직업성 난청에 걸린 노동자들이 전환배치되거나 퇴직해야 산업재해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규칙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왔다. 소음이 큰 사업장에서 일하다 이미 난청에 걸렸는데도 산재처리를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공단 “소음작업장 떠나야 청구권 발생”=23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제1부(재판장 조희대)는 최근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신아무개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장해급여부지급처분 취소소송에서 공단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신씨는 2010년 4월 병원에서 직업성 난청 진단을 받고 공단에 장해급여를 청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씨가 소음성 난청으로 장해급여를 청구할 수 있는 3년의 기간이 지났고, 청구 당시 소음사업장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산재보험법에 따르면 장해급여 청구권은 노동자의 질병이 치유된 때부터 시작해 3년이 지나면 사라진다. 산재보험법 시행규칙에는 "직업성 난청의 치유시기는 해당 근로자가 더 이상 직업성 난청이 유발될 수 있는 장소에서 업무를 하지 않게 됐을 때"라고 규정하고 있다.

공단은 해당 조항에 근거해 신씨가 2005년 11월부터 노조 전임자를 맡으면서 시끄러운 근무장소를 떠났다는 이유로 3년의 청구권 시효가 끝났다고 판단했다. 신씨가 2009년 12월부터 다시 소음작업장으로 복귀해 청구 당시 근무하고 있었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은 공단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2심인 서울고등법원은 1심 결과를 취소하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원심(서울고법)의 사실 인정과 판단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법령 위임 없는 시행규칙 효력 없어”=서울고법과 대법원은 공단 판단의 근거가 된 산재보험법 시행규칙 제48조의 별표5(신체부위별 장해등급 판정에 관한 세부기준)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산재보험법에는 부상이나 질병의 ‘치유’에 대해 "완치되거나 치료의 효과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고 그 증상이 고정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시행규칙 별표는 직업성 난청의 치유시기에 대해 "해당 근로자가 더 이상 직업성 난청이 유발될 수 있는 장소에서 업무를 하지 않게 됐을 때"로 명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서울고법은 “시행규칙이 법령의 위임 없이 법령에 규정된 치유시기와 다른 치유시기를 정해 장해급여 청구권 발생에 새로운 요건을 추가해 규정하는 경우 그 시행규칙의 규정은 행정조직 내에서 적용되는 행정명령의 성격을 지닐 뿐 국민에 대한 대외적 구속력은 없다”고 판시했다. 시행규칙 별표의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뜻이다.

이를 전제로 법원은 신씨의 장해급여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봤다. 산재보험법에 따라 신씨가 병원에서 치료의 효과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확진을 받은 2010년 4월1일 청구권이 발생했고, 나흘 뒤에 청구를 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법원은 “설사 이 사건 규정(산재보험법 시행규칙 48조 별표5)을 적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해당 규정은 근로자의 이익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보이므로, 근로자 스스로 장해급여 청구를 제한하는 규정으로 해석할 것은 아니다”고 판시했다.

근로자가 소음청 난청이 유발될 수 있는 작업장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는 소음수준이나 난청 증상 여부를 인식하기 어렵고, 사용자와의 관계상 산재신청을 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 해당 규정의 취지라는 것이다.

신씨가 노조 전임자 일을 끝낸 뒤 다시 소음이 큰 작업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청구권이 없다는 공단측 주장에 대해서는 “노조 업무가 실제 난청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키지 않는 업무인지에 대한 판단도 없이 노조로 근무장소를 바꿨다는 이유로 청구권 소멸시효가 진행된다고 본 것은 위법하다”고 밝혔다. 신씨가 노조 상근자로 일하면서도 안전점검이나 여론청취·민원처리를 위해 매일 평균 3시간 정도 소음작업장을 방문하는 등 지속적으로 소음에 노출된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문제의 시행규칙 자동폐기”=법원에서 쟁점이 된 산재보험법 시행규칙과 별표조항은 그동안 소음청 난청에 걸린 노동자들의 산재처리를 막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예컨대 퇴직한 뒤 3년이 지나서야 소음성 난청 진단을 받은 노동자들은 장해급여 청구권 소멸시효가 끝나 버려 산재신청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신씨를 대리해 사건을 담당한 함성일 변호사(법무법인 지인)는 “현대중공업처럼 소음성 난청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곳에서 일하다가 실제 난청에 걸린 노동자들은 퇴직하거나 전직을 해야 산재처리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평가했다. 함 변호사는 “문제가 된 산재보험법 시행규칙은 대법원 판결로 폐기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덧붙였다.

공단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노동부에 보고할 예정"이라며 "대법원 확정판결이기 때문에 시행규칙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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