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 노사가 11년 만에 임금·단체협상을 재개한 가운데 노조 대표자가 속한 하청업체가 교섭 도중 난데없이 폐업을 공고했다. 해당 업체는 사장의 건강이 악화돼 폐업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지만 노동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하청업체 노조를 무력화하려는 원청업체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11년 만에 열린 현대중 사내하청 노사 임단협

25일 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에 따르면 현대중과 도급계약을 맺은 하청업체 9곳,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 2곳이 지난달 11일부터 임금·단체협상에 들어갔다. 지회가 설립된 2003년 첫 교섭을 벌인 이래 11년 만에 교섭이 재개된 것이다.

이번 교섭은 업체별 개별교섭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회는 올해 교섭에서 △노동조합 활동 보장 △근로기준법 준수 △안전한 일터 확보 △성과급·학자금 원청 정규직과 동일하게 지급 △조선소 비정규직 노동조건 차별 금지를 주요 요구안으로 제시했다.

올해 교섭이 다시 열리기까지 지회는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1년 전 지회 간부와 조합원이 속해 있던 하청업체들이 잇따라 폐업하고, 새로운 하청업체가 들어와도 조합원만 고용승계가 되지 않는 후폭풍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교섭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반복될 조짐을 보인다. 지회장이 소속된 하청업체 신화ENG가 지난달 31일 돌연 폐업공고를 했다. 불과 이틀 전까지 교섭장에 나왔던 회사측은 “경영실적 부진과 대표이사의 건강악화로 사업을 더 이상 계속 운영하기 어려워 8월31일부로 폐업할 예정”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중과 10년 넘게 도급계약 관계로 일한 업체가 느닷없이 폐업을 공고한 것이다. 특히 신화ENG는 사장 외에 총무와 소장 등 관리자들이 친인척 관계로 엮여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장이 아니더라도 회사를 이끌 만한 경영진이 충분하다는 것이 지회의 설명이다. 지회가 노조 무력화를 위한 위장폐업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 이유다. 지회 관계자는 "원청인 현대중의 암묵적인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다시 불거진 위장폐업 논란

지회가 이같이 의심하는 이유는 과거 하청업체들이 줄줄이 폐업할 때 현대중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2010년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설립 이후 노조간부와 조합원에 대해 하청업체 폐업이라는 방식으로 사업장에서 배제(해고)한 것은 정당한 노조활동에 대한 지배·개입 행위로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하청업체 노조에 대한 원청업체의 사용자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 조선업이나 철강업처럼 사내하청 비중이 높은 업종의 노조활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됐다. 그러나 현실은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김백선 지회 사무장은 “현대중은 예나 지금이나 사내하청 노동자에게 정규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지급하면서 온갖 위험한 업무를 떠넘기고, 하청노동자가 죽거나 다쳐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달 발표한 고용형태공시에 따르면 현대중의 '소속 외 근로자' 비중은 무려 59.5%다. 조선소 안에서 배를 만드는 노동자 10명 중 6명이 사내하청을 비롯한 간접고용 노동자다. 고용이 불안정하고 차별적인 노동조건을 적용받는 노동자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정부는 개선방안으로 원청 대기업 노사의 ‘배려’를 강조하고 있다. 이기권 노동부 장관은 이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원청 대기업 노사가 2~3차 협력업체를 배려해야 일자리 격차가 줄어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하청노동자의 노조활동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원·하청 노동자 간 격차를 줄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반론이 적지 않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정부가 말로만 소득주도 성장을 외칠 것이 아니라 열악한 조건에 놓인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상황을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제도적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우선”이라며 “전근대적인 노조탄압 의혹이 제기된 사업장부터 적극적으로 근로감독을 벌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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