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조선왕조는 노비제 사회였다. 양반·상민·노비는 조선시대의 3대 신분이었다. 학자마다 입장이 다르고 시기마다 차이는 있으나, 조선시대 노비는 많았을 때 인구의 30%에서 50%를 차지했다. 어떤 학자들은 노비의 존재를 이유로 조선시대를 노예제 사회로 보기도 한다.

노(奴)는 남자고 비(婢)는 여자다. 그 자식들은 저절로 노비가 되는 세습 신분이었다. 노비는 상민과 함께 조선시대의 생산자인 농민층을 구성한 양대 신분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의 상식과 달리 사농공상(士農工商)에 관련된 모든 곳에서 일했다. 왕실이든, 관아든, 양반집이든, 논밭이든, 장터든, 주막이든 노비가 일하지 않으면 조선은 굴러갈 수 없었다.

노비는 주인을 위해 농사를 지었다.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마당을 쓸고, 마루를 닦고, 똥을 푸는 가사노동은 노비의 차지였다. 주인을 시중들고 수행하며,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했다. 비(여종)는 남자 주인을 위해 유모나 성적 노리개가 됐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으며 춤을 췄다. 주인의 효행을 증명하기 위한 3년상 시묘살이에도 궂고 힘든 일은 노비가 도맡았다. 주인집 관혼상제 준비와 실행도 노비의 몫이었다. 주인이 귀양살이를 떠나면 노비가 따라가 시중을 들었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을 때도 그 곁에는 시종이 붙어 있었다. 의병장 곽재우를 맨 먼저 따라나선 이도 그 집의 종들이었다. 전략과 전술도 없이 분기탱천한 주인을 따라 전쟁에 나섰다가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임진왜란 의병의 상당수가 양반사족의 가노(家奴)였다. 주인을 대신해 날로 문란해지던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몸으로 때운 이도 노비였다.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려 봉화를 올린 이도, 왕조의 통신망을 책임졌던 역참을 관리한 이도 노비들이었다. 의녀 대장금은 관비였고, 의녀들은 고관대작들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춰야 했다. 왕궁과 관공서의 하찮은 일들을 맨몸으로 떠맡았던 실무자들은 대부분 노비였다.

고려시대였던 1198년 당대 최고실권자 최충헌의 사노비였던 만적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골의 고통만을 당할 수는 없다”며 반란을 모의하다 적발돼 참살당했다.

결과는 허무했으나 만적의 이름은 남아 한국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노비해방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대표적”이라 함은 1894년 조선왕조가 갑오개혁으로 노비제도를 공식 폐지할 때까지 이렇다 할 노비해방운동이 벌어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물론 “5천년 배달겨레”의 역사와 함께해 온 노비제의 숨통에 쐐기를 박은 충격파들이 있었다. 서학으로 불렸던 천주교의 확산과 내전으로까지 치달은 동학의 성장이 그것이다.

조선시대 500년을 통틀어 체제를 뒤엎은 민중들의 반란은 없었다. 조선 후기를 장식했던 실학자들은 노비해방과 인간평등을 설파하지 않았다. 개혁군주라 칭송받는 정조의 꿈은 요순시대로 회귀하는 반동적인 것이었다. 하느님 앞에서 양반과 쌍놈이 같다고 가르쳤던 천주교는 19세기 후반 외세에 문호를 연 조선왕조로부터 사실상 합법종교로 인정받으면서 ‘평등의 정신’을 멀리했다. '사람이 곧 하늘'임을 내세운 사상 최대의 민란이었던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일본군과 연합작전을 편 조선왕조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됐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노동자들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는다. 옛날에는 노비들이 하던 일을 지금은 노동자들이 하고 있다. 영세업체 노동자·비정규직·도시빈민·빈농 등 사회 최하층을 차지하는 계층과 그 가족의 숫자를 추리면 전체 인구의 50%인 2천500만명을 훌쩍 넘을 것이다. 노비제도가 가진 세습신분으로서의 속성을 논외로 한다면, 대한민국 사회경제의 중추를 굴러가게 만드는 이들을 ‘21세기판 노비’라 불러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사실 직업 전환이나 교육 따위를 통한 계급상승과 신분이동이 점차 불가능해지는 오늘날의 상황은 신분이 세습되던 봉건왕조 시대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귀족제도의 유산인 세습제는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상속권의 모습으로 진화해 현대자본주의의 핵심원리로 격상된 지 오래다. 대한민국에서 사유재산권과 자본주의를 물신화하는 선동꾼들은 자유시장경제의 미덕으로 경쟁을 내세우지만, 체제의 윗자리로 올라갈수록 경쟁은 사라지고 특권이 판치는 현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노동자와 빈민은 피라미드의 밑바닥에서 힘든 노동과 갖은 굴욕을 감내하고 있지만, 부자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아 무위도식하며 벌어들인 불로소득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다.

왕조시대의 노비제가 결국 폐지됐듯이 노동자가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전적으로 임금에만 의존해야 하는 임금노예제도 언젠가는 폐지되고 말 것이다. 물론 그것은 격렬한 사회변동과 계급갈등, 그리고 국제정세의 혼란 속에서 이뤄질 것이라는 교훈을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다.

올해는 우리 역사에서 국가권력과 지배계급이 스스로 노비제 폐지를 선언한 지 120년째 되는 해다. 유구한 반만년 민족사와 함께했던 노비제의 폐지는 만물은 결국 변하고야 만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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