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신
한국비정규
노동센터 소장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온다. 그는 식민과 분단, 전쟁과 독재의 그늘진 우리 역사를 얼마나 알까. 취임 후 아시아의 첫 방문지로 한국을 찾는다는 교황에게 'South Korea'는 어떤 의미일까. 곡절 많은 아르헨티나 현대사를 겪은 그였기에, 거리의 교황이란 별칭처럼 자본주의 모순을 질타하며 고통 받는 이들의 현장에 함께해 온 그였기에 위안부 할머님들과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만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정의가 무너지고 상식이 실종된 한국 사회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리라고 기대한다.

16일 교황이 집전하는 시복미사에는 100만명이 운집한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로서는 미사 장소인 광화문과 그 인근에서 거점농성을 벌여 온 세월호 유가족·장애인공동행동·케이블방송 티브로드-씨앤앰 비정규 노동자가 눈엣가시일 터다. 벌써부터 언제 농성장이 침탈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감돈다. 방탄차와 고급승용차를 거부해 온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경찰의 방호벽 자체가 결례가 될 수 있다. 고통 받는 이들과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아예 단절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농성장 침탈이라니. 정부가 무리수를 두지만 않는다면 교황이 진심 어린 환대 속에서 이 나라를 떠날 수 있다. 그런데 왜 투쟁하는 비정규 노동자마저 교황을 쳐다봐야 하나. 민주노총은 어디에 있는가.

민주노총은 한국노총과 함께 조직노동자를 대표해 왔다. 특히 역사적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이 높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양산된 비정규직과 노동시장 양극화, 10% 내외로 주저앉은 조직률로 계급 대표성은 바람으로만 화석화됐다. 미조직 영역의 전략조직화를 위해 선도적인 시도를 했지만 아직까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분투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비정규직 당사자들의 직접 조직화가 핵심적인 성패 요인임이 분명해졌다. 문제는 비정규 노동자의 조직화와 투쟁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가 대단히 어렵고 생존율이 낮다는 사실이다. 준법적 수준의 요구임에도 사용자의 공세에 밀려 무릎 꿇기 십상이었다. 517일간 목숨을 건 장기항전에도 정규직노조의 외면 속에서 노조 깃발을 내리고 만 한국통신계약직노조를 떠올리면 지금도 화나고 가슴이 시리다. 실패와 좌절, 오류의 전철을 되밟을 필요는 없다.

지금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에 상주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이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모범적 단결로 알찬 성과를 일군 노동자들이다. 아직 초창기지만 지역연대와 사회연대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온 일꾼들이다. 자기 투쟁현안을 넘어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에 동참하고, 장애인들과 공동투쟁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계급주체로 발돋움하고 있는 투사들이다. 이들은 진짜 사장의 책임 회피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시대, 삼성전자서비스 엔지니어들과 함께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난해 초 노조를 만들고 연말에 노사합의를 이끌어 냈고, 근로조건 개선은 물론 노조사무실을 여럿 확보하면서 민주노조를 현장에 안착시켰다. 비정규직 노동운동사에서 찾기 힘든 성공사례다.

그러나 올해 사용자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공격적인 선별적 직장폐쇄가 단행됐다. 원청 자본은 공공연히 연말까지 가겠다고 공언한다. 경우가 다른 삼성전자서비스 노사합의를 들이대면서 이 수준으로 후퇴시키자는 망발도 서슴지 않고 있다. 노조 죽이기 아니면 최소한 노조 길들이기를 하겠다는 저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민주노총이 나서야 한다. 케이블방송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 승리는 조직화가 전국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기에 케이블방송통신 거대 자본들이 씨앤앰-티브로드 투쟁을 협공하고 있다. 지난해처럼 밀리면 케이블방송과 통신업계 전체 비정규 노동자들이 조직화될 것이라는 공포가 사용자들을 뭉치게 만들었다. 다행히 호전됐지만 노숙농성 투쟁 과정에서 한 조합원이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는 불상사도 생겼다. 이미 폐업으로 해고된 비정규 노동자가 99명이다. 8월 말이면 200여명으로 늘어나 대량해고가 현실이 된다.

50일을 넘긴 파업에도 대오는 흔들림이 없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전면전이 됐다. 씨앤앰-티브로드 투쟁마저 진다면 한동안 간접고용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다. 전국적이고 전략적인 의미를 갖는 투쟁인 만큼 민주노총의 역할이 중차대하다. 사회연대투쟁을 최대한 확대해 투기자본과 노조탄압 기업을 응징해야 한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교황을 바라보지 않고 민주노총을 승리의 푯대로 응시할 수 있도록 제 몫을 해야 한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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