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4일은 프랑스대혁명 기념일이다. 파리에서는 일본 자위대가 혁명 기념 열병식에 참가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 정부가 전쟁에 얽혔던 나라들의 군대를 초청한 것이다. 2차 대전 때와 달리 1차 대전에서 일본은 영국·프랑스·미국이 주도한 연합국 진영에 가담했다. 덕택에 승전국 지위를 누렸고, 전쟁 이후 세계질서 재편에 아시아를 '대표'해 참여할 수 있었다. 이는 일본이 전후 출범한 국제연맹과 국제노동기구(ILO)의 창립 회원국이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자유·평등·박애의 상징인 프랑스대혁명 기념일에 일본 군대가 공식 초청을 받아 행진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과 잔학행위를 경험한 한국인에겐 기분 나쁜 일이다.

개인적으로 왕과 귀족의 모가지를 자르고 공화국을 수립한 프랑스대혁명 기념일에 국민의 군대가 아닌 왕실 군대로서의 역사적 기원을 가진 일본 자위대를 불러들인 프랑스 당국의 처사가 불만스럽다. 하지만 1789년 7월14일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별로 민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6월25일이 한국전쟁을 시작한 날이지 대표하는 날이 아니듯, 7월14일도 프랑스대혁명을 시작한 날이지 대표하는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1788년 프랑스에는 흉년이 들었고, 국가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1789년 5월5일 삼부회가 소집됐다. 루이 16세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한 삼부회는 성직자대표단과 귀족대표단(판사·법복귀족·대영주), 제3신분대표단(변호사·상인·은행가·공장주·지주·신부)으로 구성됐다.

의사결정을 둘러싸고 제3신분대표단은 머릿수 투표를 원했고, 국왕과 성직자·귀족대표단은 신분별 투표를 원했다. 제3신분대표단은 과세 문제를 넘어 정치개혁까지 다루기를 원했고, 구체제의 봉건지배층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제3신분대표단은 삼부회라는 이름을 거부하고,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라는 이름을 관철시켰다.

사태가 통제 불능으로 치닫자 루이 16세는 6월19일 각의를 열어 삼부회 회의장을 폐쇄했다. 이에 격분한 제3신분대표들은 “우리들은 헌법이 제정돼 확고한 토대 위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해산하지 않고 어디서든 회합을 가질 것”이라고 맹세했다. 국왕은 무력진압을 명령했으나, 절대왕권과 충돌을 빚던 성직자와 귀족들이 제3신분 진영에 가담하면서 반동조치는 성공하지 못했다. 7월7일 헌법기초위원회가 구성되고, 7월9일 국민의회는 스스로를 제헌국민의회로 선언했다. 이로써 “절대왕권을 국민주권으로 대체한 법률혁명”이 달성됐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파리와 베르사유 인근에 있던 병력 2만명을 소집했다. 국민의회 해산이 목적이었다. 네케르를 필두로 한 개혁파가 각의에서 파면되고, 수구파들이 그 자리에 임명됐다. 국민의회는 국왕의 반동조치에 저항할 물리력이 없었다. 이때부터 생활비 앙등과 실업사태로 불만에 가득 차 있던 파리의 민중세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소요와 시위가 잇따랐고, 마침내 7월14일 민중은 무기를 탈취하고 구체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를 점령했다.

힘에 밀린 국왕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16일 네케르를 재입각시키고, 7월17일에는 베르사유왕궁을 떠나 “계급의 적들”이 우글거리는 파리로 귀환하는 데 동의했다. 파리로 돌아온 국왕은 “군주와 민중 사이의 장엄하며 영원한 결합”의 상징인 삼색모장을 증정받았다. 이로 인해 제3신분, 즉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주권을 인정받았고, 절대왕정과 귀족에 대항한 유산계급은 자유를 얻었다.

만약 프랑스대혁명이 여기서 끝났다면, ‘대'혁명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봉건지배층은 더 이상의 타협과 양보를 원하지 않았고, 부르주아지도 혁명이 더 이상 전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한 구체제는 민중을 일깨웠다. “국왕·군대·법원·경찰”에 대항해 코뮌이라 불리는 도시민중들의 자치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이다.

식량부족과 물가 앙등에 등골이 휜 민중세력은 간접세 폐지, 곡물매매에 대한 엄격한 통제, 빵값 인하를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여기에 봉건적 착취의 폐지를 원한 농민들이 가세했다. 시골에서는 귀족의 성채와 토지장부 문서고가 불타올랐다. 혁명은 부르주아지가 주도하고 왕과 귀족이 타협한, 가진 자들의 정치개혁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도시민중과 농민이 자신들의 경제적 권리를 위해 무기를 든 사회혁명으로 성장한 것이다.

마침내 1792년 8월10일 더 많은 빵과 자유를 요구한 파리 민중들의 봉기는 혁명을 부르주아입헌주의를 넘어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동시에 외세에 나라를 팔아넘기려 망명을 꾀하다 체포된 루이 16세는 왕비와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세계적으로 오늘날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이 대세가 된 데에는 1792년 8월10일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민주정이 정치제도의 개혁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경제체제의 변화를 포괄하게 된 것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점에서 '왕-귀족-부르주아지'의 타협을 물리력으로 보증해 준 7월14일을 기념하는 행사에 일제의 잔재인 자위대가 초청받았다고 기분 나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대한민국의 1987년 6월은 프랑스혁명기의 1789년 7월에 해당할까, 아니면 1792년 8월에 해당할까. 요즘 판국을 보면 뒤보다는 앞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지금 우리가 누리는 노동권은 1789년 7월에 이뤄진 “법률혁명”보다는 1792년 8월 봉기로 이뤄진 혁명 성과들에 빚지고 있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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