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거울이 비뚤어졌다고 욕하기 전에 혹시 비뚤어진 것이 자신의 얼굴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박태주 고용노동연수원(59·사진) 박사의 말이다. 여기서 ‘거울’은 본인, ‘자신’은 현대자동차 노사를 가리킨다. 역시 도발적이다. 한국 노사관계에 있어 최대 파워그룹인 현대차 노사를 상대로 이렇게 ‘디스’를 날릴 수 있는 지식인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노사 양쪽으로부터 무작위로 욕을 먹고 있는 중이다. “밤길 조심하라”는 협박(?)도 받았다고 했다. 그가 최근 펴낸 논쟁적 저작 <현대자동차에는 한국 노사관계가 있다>(매일노동뉴스)에 대한 반응이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현대차 노사관계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현대차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한국의 노동운동을 위해서도 현대차 노사관계의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믿고 있다. 현대차가 한국 노사관계의 원형을 간직한 유형설정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현대차 노사와 인연을 맺은 지난 10여년간 회사의 비밀스러운 정원에도, 노조의 흥건한 술자리에도 잠입했다고 했다. 조심스레 이들의 밀담을 지켜보기도 했다. <매일노동뉴스>가 1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의 한 커피숍에서 박태주 박사를 만났다. 인터뷰는 자발적 스파이이자 적을 사랑한 한 지식인의 염탐보고서에 대한 이야기다.

현대차 파업의 '불편한 진실'

지난 겨울 명동의 한 식당에서 현대차 노사에 대한 책을 써 볼 생각이라는 박 박사의 얘기를 처음 들었다. 그로부터 7개월여 만에 무려 424쪽에 달하는 우량아가 태어났다. 10여년간 모은 노사 양측의 자료, 무수한 인터뷰와 술자리 방담 녹취, 국내외 전문서적까지 총망라했다. ‘글로벌 톱 5’를 외치는 현대차에 대한 제대로 된 책 한 권 찾아보기 힘든 현실에서 옥동자가 나왔다. 그는 어떤 얘기가 하고 싶었던 것일까.

현대차 파업에 대해 그가 말하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노사관계의 안정성 여부를 국제적으로 비교할 때 사용하는 지표는 ‘파업성향’이다. 노동자 1천명이 1년 동안 며칠이나 파업을 했는가를 나타낸 수치다. 1997년부터 2006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파업성향은 37일이다. 반면 2003년부터 2012년까지 우리나라의 파업성향은 52.2일이나 된다. 같은 기간 현대·기아차 노조가 파업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파업성향은 37.4일로 낮아져 OECD 평균과 거의 같아진다.

“이런 통계는 언론들이 현대차 노조를 노사관계의 안정을 해치는 공공의 적으로 몰아가는 준거가 된다. 현대차 조합원에 대한 ‘귀족노조’라는 비난 역시 언론이 유포하고 사회가 묵인해 준 담론에 불과하다. 하지만 노조의 파업은 그다지 위력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이것이 문제다.”

노조가 파업을 해도 생산차질과 판매차질이 크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파업에 따른 물량차질은 파업이 끝난 뒤 잔업과 특근으로 벌충할 수 있고, 판매 역시 국내 공장과 해외 딜러 대리점에 쌓여 있는 수개월치의 재고를 밀어내는 것으로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박 박사는 “결국 줄 것은 다 주고 파업은 파업대로 진행되는, 최악의 조합이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유가 뭘까. 박 박사는 자신의 책에서 한 노조간부의 진술을 소개했다.

"무파업 타결은 노사 양측에 바람직스럽지 않다. 회사로서는 퍼 주기라는 비난을 뒤집어쓸 거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노조 내부에서도 집행부가 최선도 다하지 않은 채 사측의 제안을 수용했다는 어용논란이 불거진다."(책 75쪽)

박 박사는 이를 ‘갈등적 담합관계’라고 명명했다. 노사갈등은 담합을 위한 과정이었거나 포장하는 수단이었다는 질타다. 문제는 이러한 담합이 제3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피해자는 비정규직과 협력업체 노동자다. 멀리는 자동차를 구매하는 소비자에게도 부담이 전가된다.

'주간연속 2교대제' 다음은 '유연한 3교대제'

현대차 노사가 ‘이상한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는 배경에는 노동자들이 느끼는 ‘고용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현재의 고용안정은 호황에 가려져 있을 뿐이라는 것이 박 박사의 얘기다. 자동화·외주화·모듈화로 대표되는 현대차의 생산방식, 숙련의 부재에 따른 낮은 생산성과 고임금의 괴리, 정규직 대체인력으로서의 비정규직, 해외생산 확대 등은 모두 현대차 정규직의 고용을 위협하는 요인이다.

고용불안은 98년 정리해고의 경험이 새긴 트라우마다. 박 박사는 “‘있을 때 벌자’는 말은 수준 높은 은유나 추상적인 상징이 아니라 고용불안의 직접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높은 임금을 향한 질주는 이 같은 고용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안, 중산층의 삶에서 추락할지 모른다는 공포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상황은 현대차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을 내면화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에 따르면 2011년 현대차 노동자들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천678시간이다. 반면 같은해 OECD 평균은 1천765시간, 우리나라 전 산업 평균은 2천90시간이다.

여기에도 노사 담합의 정치가 개입한다. 박 박사는 “현대차 노동자들은 초과노동 의존적인 생산체제하에서 노동전일적인 삶을 살고 있다”며 “현대차의 장시간 노동은 임금소득 극대화를 노리는 노동자와 인건비 및 설비투자비 절감을 노리는 회사가 담합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현대차 노사는 지난해 3월 주야 맞교대 방식의 교대제를 주간연속 2교대제(8시간+9시간)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노동자 개인의 노동시간은 연간 210시간 정도 줄었다. 노사는 이를 위해 오랜 논쟁과 갈등의 시간을 보냈다. 박 박사는 전문위원 혹은 자문위원 자격으로 현대차 교대제 개편 과정에 동참했다. 그는 “현대차의 주간연속 2교대제 도입은 업계 최초로 근무형태를 바꿔 노동시간을 줄이고, 밤샘노동을 없앰으로써 다른 업체에 준거의 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노동시간단축이 일자리 나누기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한계다. 노사가 ‘임금 보전’과 ‘생산물량 보전’을 맞교환한 결과다. 일자리 창출의 여지는 봉쇄됐다.

이와 관련해 박 박사는 2016년 시행 예정인 ‘8시간+8시간’ 방식의 주간연속 2교대제 완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때 현재의 2교대 방식을 ‘유연한 3교대’ 방식으로 전환할 경우 노동시간단축의 효과가 커지고, 일자리 창출의 여지도 모색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렇게 해야 공장 가동시간이 길어져 회사 입장에서도 설비투자비용에 대한 본전을 뽑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사실 외국의 유명 자동차 회사들은 90년대 이래 3교대제를 수용해 왔다. 독일의 폭스바겐은 3교대제를 기본으로, 1년간 야간노동만 담당하는 ‘상시야간조’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 시장의 불확실성에 대비해 설비증설이나 공장신설보다는 현 조건에서 개별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공장 가동시간을 늘려 물량을 맞추려는 전략이다. 현대차 공장도 한국과 중국을 빼면 3교대제로 운영된다.

박 박사는 “야간노동 철폐를 바탕으로 하는 주간연속 2교대제의 취지와 어긋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며 “그러나 우리 사회 구석구석은 이미 24시간 경제에 맞춰져 있고, 이런 상황에서 야간노동이 불가피하다면 ‘보호되고 규제된’ 야간노동의 조건을 확보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대차 노사가 이러한 제안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뒤에서 화살 쏘기는 서로에게 도움 안 돼"

박 박사는 자신의 책을 ‘노사관계 세밀화’라고 소개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감도’가 아니라 현장에 들어가 스케치한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공정성을 추구하고 자기검열도 생략했다고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열린 논쟁이다. 논쟁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집필의도다. 뒤에서 화살 쏘기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의 이 같은 바람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비판보다는 비난이 많아 보인다. 현대차 노사에 대한 추가연구의 기회가 주어질지도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본 대로 느낀 대로, 후과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 같은 노력의 결실이 한국의 노사관계를 위한 생산적인 토론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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