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유효한지 모르지만,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노동운동의 정파를 크게 국민파·중앙파·현장파로 나눠 살피던 때가 있었다. 십 년 전에는 세 정파 모두 민주노동당의 깃발 아래 모여 있었다. 당 안에서 치고받았지만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동전의 양면으로 봤고 민족자주와 평등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자임했다. 일하는 사람들에는 노동자와 더불어 농민·도시빈민·청소년·장애인·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가 어우러져 있지만 그 주력은 노동자였다.

2000년 1월 창당된 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를 당의 이념으로 내걸었다. 지향하는 사회주의의 내용이 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다양했다. 하지만 노동자 착취로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려는 정당이 ‘진보적 민주주의’ 같은 물타기가 아닌 사회주의를 정면으로 내세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1987년 민중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성장해 온 한국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경로였다.

민주노동당은 대중정당을 지향했는데, 이는 노동조합을 비롯한 대중조직과 함께한다는 뜻으로 계급정당을 지향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창당 후 첫 선거였던 2000년 총선의 정당투표에서 민주노동당은 22만3천표(1.2%)를 얻었다. 누구도 낙담하지 않았다. 2004년 총선에서 277만4천표(13.03%)를 얻어 비례대표 8명을 포함해 모두 10명을 당선시켰다. 당원의 40%가 민주노총 조합원이고 의원 다수가 노동운동 출신인 데서 드러나듯이 당의 노동자 중심성은 확고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당은 노동자 중심성을 튼튼히 하고 한국노총을 비롯한 조직노동을 끌어안아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대중정당으로서 조직과 활동의 폭을 넓히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대기업-정규직 노조’를 기득권으로 낙인찍고 당의 모태인 민주노총에 거리를 두는 게 유행이 됐다. 당에 절실한 인력과 자원의 바탕을 스스로 허물어 버린 것이다.

민주노총조차 무시하는 이들의 눈에 한국노총 조합원들이 보일 리 없었다. 조직노동과 대중조직에서 멀어진 민주노동당은 내분에 휩싸였다. 2008년 3월 진보신당이 갈라져 나갔고, 2008년 4월 총선을 계기로 변호사 등 중간계급이 주도하는 당으로 전락했다. 마침내 2011년 12월 국민참여당과 합쳐 통합진보당으로 변신하면서 민주노동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민주노동당의 깃발 아래 한데 묶였던 노동운동의 정파들도 따로따로다. 이번 지방선거에 이름을 내건 진보정당만 통합진보당·정의당·노동당·녹색당 등 네 개다. 여기에 더해 민주당과 안철수로 대표되는 새정치민주연합으로 흩어진 이들도 여럿이다. 이당 저당 아닌 무당파도 많다. 그렇게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깃발은 꺾이고 내버려졌다.

무엇이 잘못됐던 것일까. 되돌아보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하자는 정당에서 조직노동이 중심에 서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려난 게 가장 큰 패착이 아닐까 싶다. 주된 원인은 노동운동 스스로의 역량과 자질 부족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당에 몸과 돈만 댔지, 지도부와 실무자 그리고 이념과 정책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데 실패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당 운동은커녕 노동조합운동 스스로를 채우고 메울 자원과 인력을 찾는 것에도 힘이 달렸다.

정파들로 좁혀 보자면, 이름값을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국민파엔 한국노총 조합원을 비롯해 일하는 사람을 아우르는 ‘국민(people)’이 없었다. 중앙파엔 말 많은 조직들과 정파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조화를 일궈 가는 ‘중앙’이 없었다. 현장파엔 노동자들이 자기 삶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현장’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없었다. 지금은 세 정파들도 세포분열해 더 많은 조직과 분파들로 잡다하게 갈라져 그 계보를 가늠하기 힘들다.

대안은 없는 것일까. 사실 답은 누구나 알고 있다. 정파와 인맥이 중앙을 장악하도록 둬서는 안 된다. 공식 조직과 의결기구가 중앙에 서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조합원들의 상태를 바로 알고, 현장을 튼튼히 하는 사업을 벌여야 한다.

국민(people)과 함께해야 한다. 여기서 국민은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아 본 적이 없는 보통 노동자를 말한다. 이들의 권리와 이익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노동운동이 앞장서야 한다.

역시 문제는 실천이다. 진정 국민파·중앙파·현장파다운 실천 말이다. 정파가 아닌 노동운동 전체가 ‘국민’과 ‘현장’을 ‘중앙’에 놓는 사업과 활동을 벌여야 한다. 허공에 흩어진 말들이 만난을 무릅쓴 실천을 통해 하나하나 엮여지고 그 알맹이를 채워 갈 때, 역사의 시궁창에 팽개쳐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깃발을 다시 끌어올릴 날은 밝아올 것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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