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도록 감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동료 죄수들은 잠들었다. 감옥에 갇히기 전의 시간들을 더듬어 본다. 나는 편집장이자 발행인으로 정치잡지(Voice of Taksin)의 기사들을 다듬고 있었다. 3만부를 찍는 일은 힘들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짭짤했고, 정치 토론과 논쟁의 중심이 됐다. 미디어와 보수 엘리트들이 왕실을 모독한다고 여길 만큼 몇몇 기사들은 선동적이기도 했다. 이들의 비난은 잡지의 평판과 명성을 끌어올렸다. 정치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했기 때문이다.

나는 1992년부터 2005년까지 태국 중남부에서 노동활동가로 일했다. 노동자들의 곤경·고통·절망·고용주들의 착취를 잘 알게 됐다. 노동자들이 겪는 끔찍한 조건은 더 많은 이윤을 좇는 고삐 풀린 경제성장의 결과였다. 노동자들에게 권리와 존엄을 돌려주는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여러 해의 투쟁으로 노동조건과 임금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국제기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2008년 나는 반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으로 알려진 초기 레드셔츠 운동의 핵심 참가자로 태국 북부에 초청받아 갔다. 당시 레드셔츠 집회의 참가자수는 적었지만, 2008년 민주당 당수 아비싯 베짜지바가 새 정부를 구성하면서 늘어났다. 민주당은 보수 왕당파인 옐로셔츠 운동을 대표했다. 여러모로 애쓴 덕분에 2010년 9월 치앙마이에서 1만명이 넘는 대규모 집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방콕 레드셔츠 집회 진압으로 투옥된 UDD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2009년까지만 해도 태국 남부에는 레드셔츠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때 나는 팟탈룽주에서 열린 한 추모집회(Red Tank Tragedy)에 초청받았다. 1970년대 군부는 태국 남부에서 벌어진 공산주의 활동을 폭력으로 진압했고, 연루자들을 헬리콥터에서 내던지거나 드럼통에 넣고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 집회는 이 비극을 추모하는 것이었다. 나는 남부의 레드셔츠 운동을 시작하는 기회로 삼았고, 여러 차례 남부를 찾았다.

레드셔츠 운동은 2008년 태국 동북부에 위치한 이산에서 시작됐다. 이산은 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고, 정부에서 레드셔츠 운동을 대변하는 푸타이당(Pheu Thai Party)의 권력 기반이다. 2009년 이산에서 열린 레드셔츠 정치행사에 와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태국 중부와 동부에서 열린 집회와 교육에도 참가했다. 집회에는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누구나 참가했다. 그들을 동원한 것은 태국 사회와 정부를 엘리트만이 아닌 모든 시민의 것으로 바꾸려는 열망 때문이었다.

나는 지도자도 정치인도 아니다. 연설을 잘하지도 못하고, 널리 알려진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태국 사회의 불평등과 그 개혁에 관심이 많다. 이런 이유로 민주주의·평등·자유·정의를 증진하기 위해 레드셔츠 정치운동에 참여했다. 최고 권력은 인민에게 속한다. 이것이 내가 레드셔츠 운동의 중요 매체가 된 잡지를 만든 이유다. 나는 왕실모독죄의 개정을 공개적으로 청원했고, 왕실모독죄 위반을 이유로 2011년 4월 체포됐다. 15번이나 보석을 청구했지만 기각당했다. 대법원 판결까지 재판은 몇 년 더 걸릴 것이다.

감옥은 비좁고 질병이 만연해 있다. 나는 갖은 모욕을 감수하면서 최종 판결을 기다리며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태국 사법제도는 최종 판결 전에는 사면이나 가석방을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유죄를 인정하고 이른바 범죄행위에 연루된 사람을 발고한다면, 왕실의 사면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 도덕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왕실의 사면을 받아들여 자유를 얻더라도 나는 양심의 죄수가 될 수밖에 없다. 대법원에서 유죄를 받을 수도 있고 그 전에 죽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부당함과 위법함에 맞서 고통 받는 것을 스스로 택했다. 감방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어둡다. 태국 사회의 도덕적 어두움처럼 하늘은 어둡다. 바라건대, 아침이 밝아 오길.

* 필자는 2011년 4월 왕실모독죄로 체포돼 1심에서 11년형을 선고받고 3년째 수감 중이다. 이 글은 2014년 4월29일자 <방콕포스트>에 실린 것으로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가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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