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9일 긴급민생대책회의에서 한 이야기는 간단했지만 나름의 진실을 담았다.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경제가 나빠지면 국민 모두 손해다.” 산업화 이후 모든 정권이 이야기한 내용이다. 시민안전에 쓸 돈을 줄여 기업 기술개발을 지원하고, 시민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규제를 없애 기업의 비용을 줄여 주며, 이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은 탄압하는 것. 이것이 국민통합을 통한 경제발전의 요체였다.

세월호 자체가 그 증거다. 정부의 해양안전 관련 지출은 항만확충 및 기업지원의 5%에도 미치지 못했다. 안전규제는 통째로 해운회사 이익단체에 맡겨 버렸다. 해운회사의 노조설립은 선원법을 이유로 각종 부당노동행위를 눈감아 주는 것으로 봉쇄했다. 세월호는 정확히 이 세 조건을 최대한 이용해 돈을 벌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규제철폐도 마찬가지다. 당장 이번 참사와 관련해서도 이명박 정부가 여객선 선령제한 규제를 20년에서 30년으로 완화해 세월호가 일본에서 수입될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안전업무를 위해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던 선원 공급업체가 2천년대 들어 자유화돼 이번 참사와 같이 권한도 없고 숙련도 없는 선원들이 여객선을 책임지는 일이 일반화됐다.

2천년대 16번 개정된 해운법은 해운산업 육성과 해운회사에 관한 각종 지원책만 늘렸고, 안전규제와 관련해서는 대부분의 조항을 완화 또는 간소화했다. 정부와 국회 모두 규제완화라는 명분으로 해운회사들 돈 벌게 해 줄 방법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규제완화는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를 앞에 두고 세월호가 돈을 벌도록 한 것이 정부의 일이었다고, 이 시대 국가는 사회가 아니라 시장만을 보호한다는 냉정한 사실을 당당하게 이야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민들의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부의 답은 “바로 이런 게 국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 민주국가의 토대 중 하나는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이걸 포기하는 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거버넌스(통치성)를 포기하는 것이다. 즉 쟁점은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국가 ‘개조’가 아니라 차라리 국가 ‘재건’에 가깝다.

한편 시민들은 이번 참사를 계기로 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하고 있으나, 정작 보수야당이나 분열된 진보정당들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정부의 만행보다 더 끔찍한 것은 시민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대안세력이 없다는 점이다. 국가의 무능으로 사회가 불안한 가운데 대안세력까지 무너졌을 때 역사적으로 파시즘과 같은 극단적 우파세력이 성장했다. 한국 사회 역시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신자유주의 정책의 최전선에서 십수 년을 싸워 온 노동운동이 앞장서야 한다. 노동조합만큼 신자유주의 규제완화가 어떤 안전사고를 만들어 냈는지 잘 아는 집단은 한국에 없다.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안전 점검부터 실제 운행까지 현장에서 수십 년을 일한 안전전문가다. 건설노조 조합원들은 건축물 안전에 대해, 금속노조 조합원들은 공장 안팎 안전에 대해, 민간서비스연맹 조합원들은 상업시설 안전에 대해, 공무원노조 조합원들은 정부 안전규제 실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어떤 점에서 우리 노동조합이 매일매일 현장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사고의 결집체다.

몇 번의 집회로 노동운동의 실천을 제한하지는 말자. 박근혜 대통령 규탄의 목소리를 거리에서 모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노동운동에게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시민안전에 관한 대안이 되는 것이다. 총연맹·산별·지역을 거쳐 지침을 통해 하향식으로 동원되는 집회 몇 번으로 변하는 것은 별로 없다. 우리 민주노조가 산업안전에 관한 기준을 현장에서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를 떠올려 보자. 쟁의대책위원회 지침으로 현장의 질서를 만들었나? 전문가가 만든 기준을 가져와 관리자를 설득했나? 아니다. 스스로 일하며 현장에서 깨달은 안전기준을 관리자들과 머리 터져 가며 싸워 현장에 정착시켜 온 것이 산업안전 개선의 역사였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이런 것이다. 정부가 몇 가지 부처를 더 만들고, 급조한 법률 몇 개를 가져다 놓는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

민주노총이 한국 사회 시민안전에 관한 대중운동을 현장에서부터 조직해 보자. 민주노총 전 조합원이 자신의 현장과 생산품을 대상으로 안전 문제를 일제 점검하고, 현장에서부터 대안을 만드는 것이다. ‘국민안전을 위한 노동자 조사위원회’와 같은 특별기구를 만들어 대안을 모으고, 대국민 안전보고서를 제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이 매년 만드는 사안별 투쟁본부나 산별노조, 연맹들이 필요에 따라 조직하는 대책기구 등을 감안하면 어렵지 않다. 수개월이 걸린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세상을 진짜로 바꾸기 위해 우리 노동운동에 필요한 것은 스스로 대안이 될 수 있는 실천이고, 현장에서부터 올라오는 대중운동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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