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철도노조 지도위원
(전 민주노총 위원장)

‘투명사회’와 ‘피로사회’의 저자로 잘 알려진 한병철 베를린예술대학교 교수는 독일 유력 일간지에 “세월호 사고의 진짜 살인자는 선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기고를 했습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18세기 개인의 정치적 자유와 재산권 보호를 위해 왕권에 도전한 시민들의 사상적 배경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투쟁한 시민들이란 ‘보호할 재산’이 있는 부르주아들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정치적 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은 의회민주주의와 삼권분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작은 정부’를 위해 국가기구를 민영화하고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시장화하는 신자유주의는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한편 고전적 자유주의의 가치조차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시장을 위해 국가개입을 최소화한다는 신자유주의 교리를 박근혜 대통령은 규제완화라는 이름으로 위장해 국민을 속이고 있습니다. 마치 민영화가 아니라 경쟁체제 도입인 것처럼 기업에 대한 규제를 암 덩어리로 묘사했습니다. 새누리당은 기업에 대한 규제법을 제정하는 의원들의 입법활동을 제약하는 법을 만들겠다고 나섰습니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 법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오늘날 한국정치의 현실입니다. 의회에 의한 행정부 감시와 견제는 사라졌습니다. 채동욱 검찰총장 찍어내기에서 여실히 보여 줬듯이 사법부가 국가권력의 시녀가 된 지는 오래입니다. 하여 지금은 고전적 자유주의가 가져온 삼권분립 등 최소한의 민주주의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자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작은 정부’는 정말 실현된 것일까요.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 국가들의 행정부는 더욱 비대해졌고 관료들의 영향력은 각 분야로 확대됐습니다. 그들이 작은 정부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말단 공무원들의 감축을 통한 공무원 숫자 줄이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관료집단의 권력은 오늘날 ‘해피아’를 만들었습니다. 민영화 선구자인 영국 대처 수상과 보수당 정권하에서 분할된 공공기관들을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국가규제기구들이 새롭게 설치됐습니다. 국영철도가 민영화되자 이들을 규제할 국가기관이 만들어진 것이죠. 해피아니 모피아니 핵마피아니 하는 관료집단과 사적자본의 결탁은 우리사회를 서서히 침몰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국가는 결코 작아지지 않았습니다. 밀양 송전탑이나 제주 강정마을과 같은 마을 공동체가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될 때 주민들의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평생 법을 모르고 살았던 시골 촌로들에게 자행된 국가폭력은 작은 정부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쌍용자동차를 진압한 국가폭력이나 철도노조 지도부를 찾겠다고 사단병력을 투입한 민주노총 침탈사건에서나 국가의 위세는 등등했습니다. 시장권력과 이를 비호하는 국가권력에 비해 작아진 것은 의회권력, 즉 정치였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정치’를 추구합니다.

정치 불신을 조장하는 자들이 정치 불신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됐듯이 작아진 정치하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노동자·민중입니다. 자본의 수하에 들어간 부패한 언론은 연일 정치 불신을 조장하는 배설물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언론권력화는 정치를 축소하고 자신들이 그 대체물이 되는 과정과 동일합니다. 어느새 주요 정당의 정치적 결정은 여론조사라는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바뀌어 버리고 언론은 여론을 조작합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여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문을 발표한 것은 1973년이었습니다. 여론은 미디어에 의해 언제라도 조작이 가능하고 숙의되지 않는 인기투표식 여론조사로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 결정되는 것은 책임정치의 종말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새 정치’는 무엇입니까. 국회의원의 잘못된 특권을 내려놓는 것은 응당 해야 할 일이지만 국회의원 정수를 3분의 1이나 줄이는 것이 새 정치가 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을 폐지하는 것 역시 ‘새 정치’의 핵심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새 정치는 정치 불신에 편승해 정치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과소 대표되고 있는 정치영역을 국가와 시장권력의 피해자들에게 돌려주는 일입니다.

철도노조 지도위원(전 민주노총 위원장) (krw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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