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이마에 돌팔매를 명중시켜 죽인 뒤, 그의 머리를 들고 있다. 구약성서 <사무엘서> 17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형상화한 작품인 셈이다. 그러나 웬일일까. 다윗의 표정은 승리감에 도취돼 있기는커녕, 오히려 회한에 찬 표정이다. 한편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골리앗의 머리는 처참함 그 자체다. 생명이 다 빠져나간 창백한 얼굴에 돌에 맞아 피멍 든 이마, 미처 다 감지 못한 눈, 죽음의 순간에 부르짖었을 법한 비명의 흔적인 벌려진 입.

이 작품은 바로크시대 초기 대표적 이탈리아 화가인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로 알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이 충격적인 이유는 카라바조가 골리앗의 얼굴을 바로 자신으로 그려 냈기 때문이다. 어쩌자고 그는 자신의 얼굴을 이토록 자학적인 방식으로, 죽은 악당의 얼굴로 형상화한 것일까.

 

▲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09~1610, 캔버스에 유채, 이탈리아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카라바조는 1573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마침 유행했던 흑사병을 피해 5살 무렵 가족들과 함께 부모의 고향인 카라바조로 이주하지만, 결국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동시에 잃고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 어려움도 잠시. 본디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카라바조는 밀라노의 여러 화실을 떠돌며 화가로서의 수업을 받은 뒤 실력을 인정받았다. 출신지를 따서 이름을 부르곤 했던 당시의 풍습을 따라 ‘미켈란젤로 메리시’라는 본명이 아닌 ‘카라바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빛과 어둠을 능숙하게 다루는 혁신적인 명암법의 화가, 종교적인 주제를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전통을 벗어나 거리에서 소재를 취해 사실적으로 그린 화가. 그렇게 카라바조는 ‘로마 최고의 화가’였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 카라바조에게는 ‘천재성’ 못지않은 ‘난폭성’이 있었다. 높아져 가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화실 밖에만 나가면 문제를 일으키곤 했던 카라바조는 보름 동안 일했으면 한 달은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허리에는 칼을 차고 한 명의 시종을 따르게 했으며, 논쟁과 결투를 벌일 각오가 항상 돼 있었다. 전기 작가 반 만데르는 이러한 그의 폭력성과 예술성을 마르스와 미네르바로 비유했다.

"마르스와 미네르바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작품성은 끝없는 매력을 지녔으며 젊은 화가들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여 줬다."

마르스는 로마의 군신으로 무력을 상징하는 것이고, 미네르바는 지혜와 예술·학예를 상징하는 여신이다. 바로 카라바조의 양면성을 일컬은 것이다.

그렇게 그의 ‘마르스’적인 면은 1600년부터 법정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1600년 10월, 그는 친구의 결투를 중재한 일로 처음 수사기록부에 오른다. 이어 경비원 상해(1601년), 화가 발리오네에 대한 명예훼손(1603년), 식당 종업원의 얼굴에 아티초크 요리를 집어던진 일(1604년), 경찰에게 욕설(1604년), 불법 무기소지(1605년), 모녀모욕(1605년), 동거 여인 문제로 공증인 상해(1605년), 여인숙 주인집에 투석(1605년) 등. 그는 6년 동안의 수사기록부에 모두 15번 나타났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이때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 <바오로의 개종> 등 진지한 종교화들을 그리고 있었다. 더할 수 없이 성스러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조차도 그에 대한 스캔들은 끊임없이 반복됐던 셈이다. 그는 그동안 여섯 내지는 일곱 차례 감옥에 갔었지만 매번 어렵지 않게 풀려났다. 이는 그의 ‘미네르바’적인 면 덕분이었다. 그의 재능을 아꼈던 고위층 후원자들이 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1606년에 이르러 카라바조는 막강권력의 후원자들조차도 더 이상 도울 수 없는 죄를 짓고야 만다. 그해 5월28일 밤 카라바조는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라누치오 토마소니와 함께 테니스 게임에 내기를 걸었다가 패싸움을 벌이게 된다. 결과는 심각했다. 카라바조가 토마소니의 하복부를 단검으로 찔렀고 토마소니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카라바조는 야반도주했고, 그 후 죽을 때까지 몰타에서 시칠리아, 시칠리아에서 다시 나폴리로 부단히 이어지는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그는 도피처에서 줄곧 환영받았다. 유명화가가 자신의 관내로 몸소 와 줬으니, 유력자들은 그에게 앞다퉈 그림주문을 했고, 따라서 도망자였음에도 카라바조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그럼에도 카라바조는 죄의식과 불안, 사면을 받아야 한다는 초조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그건 성공과 안전이 보장돼 있던 나폴리를 떠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외진 섬 몰타로 이동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로마 사법부의 추적을 받고 있던 카라바조는 몰타에서 기사작위를 받음으로써 사면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우여곡절 끝에 기사작위를 얻어냈지만 그의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기사작위를 받은 해인 1608년 10월6일, 카라바조는 동료기사와 싸움을 벌인 혐의로 또다시 투옥됐다. 한밤중에 감옥의 벽을 타고 넘어 가까스로 탈출한 그는 시칠리아로 도망쳤고 그해가 다 가기도 전에 기사단에서 제명됐다.

결국 카라바조는 다시 ‘사면’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1610년 7월. 그는 사면을 주선해 줄 수 있는 보르게세 추기경에게 헌정할 세 개의 작품을 들고, 로마로 향하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경유지였던 팔로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팔로의 스페인 군대 경비대장이 카라바조를 다른 사건의 범죄자로 착각하고 그를 체포·구금시켰던 것이다. 카라바조는 보석금을 지불하고 이틀 만에 가까스로 석방됐지만 자신의 그림들은 이미 배에 실린 채 떠나 버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림 없이는 로마에서의 사면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카라바조는 필사적으로 다음 기착지인 포르토 에르콜레를 향해 육로를 따라 걸어 올라갔다. 포르토 에르콜레에서도 그의 그림과 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실의와 피곤에 지친 카라바조는 말라리아(이질이라는 기록도 있음)에 덜컥 걸리고 말았고, 결국 고열에 시달린 끝에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해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고도 하고,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부랑자들에게 살해당했다고도 한다. 그의 나이 채 마흔도 되기 전이었다. 카라바조의 첫 번째 전기 작가인 발리오네는 이렇게 단언했다. “제대로 살지 못했듯, 그의 죽음도 불명예스러웠다.”

다시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을 보자. 카라바조는 과연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는 아마도 자책과 죄의식, 자학에 시달렸으리라. 그래서 그는 자신을 골리앗으로 표현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겸허함을 작품 속에서 형상화하려고 했을 터다. 그렇게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은총을 기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몇몇 평론가는 그림 속의 다윗 또한 젊은 시절의 카라바조의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자화상을 경멸과 동정이 뒤섞인 눈으로 지켜보는 또 다른 자화상. 그 주장이 맞다면, 카라바조는 스스로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응징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운명의 장난일까. 그가 죽기 직전, 교황 바오로 5세는 카라바조의 친구와 후원자의 요청에 못 이겨 사면 판결문에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카라바조 자신이었다. 역시나 카라바조는 승리자 다윗인 동시에 패배자 골리앗이었으며, 사형집행인인 동시에 그 희생자였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것을 증명했다.

<검은 미술관>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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