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장교 출신 이수인씨는 대형 유통업체 푸르미의 과장이다. 스스로 세운 원칙을 고지식하게 지키는 그는 군인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는 사람이다. 군대에서는 상사의 비위사실을 보고 전역지원서를 쓰고 만다. 푸르미에서는 부하직원들을 내보내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노조를 찾는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연재 중인 웹툰 <송곳>의 이야기다.

최규석(37·사진) 작가의 첫 웹툰 <송곳>은 노동(노조) 문제를 다루고 있다. 2002년 까르푸에서 실제 벌어졌던 사건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 노무현 정부라는 시대 공간, 유통업체라는 사건발생 공간을 이용해 작가는 “노동 없는 민주화는 없다”고 말한다.

재미없을 주제를 눈길 가는 그림으로 풀어내는 최 작가의 솜씨는 과거 여러 편의 작품에서 검증됐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2004년)에서는 초록 아기공룡 둘리를 주름이 자글자글한 파충류로 만들어 파란을 일으켰다. 성인이 된 둘리는 프레스기계에 손가락이 잘린 이주노동자로 등장한다. 중고생을 위한 6월 항쟁 교육만화 <100℃>(2009년), 자신의 가족을 인터뷰해 한국의 근대사 단면을 살펴본 <대한민국 원주민>(2008년), 만화과 대학생들이 자그마한 자취방에 뒤엉켜 살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습지생태보고서>(2005년) 등 최 작가는 '문제 있는 이야기'를 꾸준히 제기해 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재미없는 데다 겸손하기까지 한’ 민주노총 변호사들과의 최악의 인터뷰를 <노동자의 변호사들>에 실었다.

최 작가는 <송곳>을 통해 대중문화 영역으로 노동이라는 소재를 끌어냈다. 노조 활동가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노조 이야기입니다. 자기 욕심이 아닌 것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매일노동뉴스>와 최 작가의 인터뷰는 지난 27일 오후 그의 작업실이 있는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인근에서 진행됐다.

- <노동자의 변호사들>에서 공부 잘하고 사시까지 통과한 이들이 왜 민주노총 법률원에 있을까라는 질문을 했다. 역으로 묻자. 왜 노동문제를 다루는 작가가 됐나.

“윤리나 규범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여기는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사회문제에 관심이 기운 것 같다. 학교 다니면서 인간을 잘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의 사회가 지금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의 사람을 알려면 지금의 사회를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존경하는 활동가들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 세상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작가를 하는 건가. 아니면 작가를 하다 보니 소재를 사회문제에서 찾게 된 건가.

“세상이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못 된다. 활동가들의 삶을 보면 굉장히 존경스럽다. 그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작품에 담겨 있다. 내가 존경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의 소재는 작가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작가가 됐으니 이제 뭘 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작가 일과 소재가 동시에 합쳐진 것 같다.”

- 노조에 대한 사회적 시각은 좋지 않다. 파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많다. 작품에서 노동의 문제가 정의롭고 정당한 것이라고 독자들을 이해시키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것도 고민이지만 더 어려운 것은 쟁의행위까지 가는 과정을 표현하는 문제다. 노동위원회에 가고 조합원 찬반투표를 하는 과정에 대해서 대중은 일반적인 지식이 없다. 그런데 <송곳>에서 앞으로 쟁의행위를 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과정을 어디까지 어떻게 보여 줘야 할 것인지가 가장 큰 고민이다. 최근 노사교섭 장면을 살짝 끼워 넣었는데 독자 반응을 살펴보니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게 태반이었다. 교섭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이다. 복잡한 투쟁의 절차를 어떻게 표현할지 난감하다.”

“노조 활동가들이 이해 받도록 잘 그리고 싶다”

- 포털사이트 <다음>에 게재하지 않고 <네이버>에 게재하는 이유 중 하나가 10~20대 젊은층에게 노동문제를 알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송곳>을 통해 노조에 대해 조금이라도 인식을 하게 된 청년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직장 내에 있는 노조를 기피하지는 않게 만들고 싶다는 말도 했다. 이것이 <송곳>의 목표인가.

“대중문화 영역 안으로 노동이라는 하나의 소재를 끌어들이고 싶은 욕심이 있다. 보통의 작품들을 보면 노조가 전혀 나오지 않거나 나온다 하더라도 굉장히 평면적으로 다룬다. 아마 노조에 대해 작가가 잘 몰라서 그런 것일 거다. 내적으로는 노조 활동가들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알려 내고 싶다. 이런 인물들이 이해 받았으면 좋겠다. 잘 그려 보고 싶다.”

- <송곳>의 시대 배경은 2002~2003년이다. 이 시대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노무현 정권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03년 김주익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이 크레인 농성 중 자살했다. 그 소식을 듣고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노무현 정권에 대해 민주화운동의 기념비를 세웠다는 칭찬들을 한다. 여기에 대한 불만이 있다. 노무현 정권 말기 차기 권력은 이미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넘어간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민주화를 찬양하는 등 일부 잔치 분위기가 있었다. 그 분위기에 나도 일조했다는 불만이 있다. 노동문제 없이 민주화를 말할 수 없다. 이런 각오·불만을 갖게 된 시기가 노무현 정권 때여서 그 시절을 이야기했다. 만약 이명박 정권이 배경이 됐으면 노동문제가 민주화 운동으로 곡해돼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주화 후퇴의 시기였지 않나. 다만 '창조컨설팅'과 같은 노조 파괴자 이야기를 담고 싶은데 시대가 맞지 않아 고민 중이다.”

- <송곳>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 보자.

“1부를 마감했는데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누구라도 공감을 할 수 있는 사건들이 소재다. 앞으로 모르는 이야기가 나온다. 노조를 강화하고, 파업을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재미있게 풀어 갈 자신이 없어 걱정이다.”

“세상이 짓누르자 저절로 뚫고 나오는 이들이 활동가”

- 제목이 왜 <송곳>인가.


“활동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미지를 생각해 봤다. 세상이 누르니깐 뚫고 나오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다. 자존심을 잘 못 굽히는 사람 아닌가.(웃음) 세상이 평화롭다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살아갈 이들이다. 그런데 압박이 가해지니까, 가만히 있을 뿐인데, 저절로 뚫고 나오는 이들이 활동가들이라고 봤다.”

- 대형 유통업체 푸르미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작품에 담고 있다. 과거 까르푸에서 벌어졌던 일을 작품화한 것으로 안다. 유통업체를 소재로 선택한 이유가 있나.

“사업장을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지 고민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더 극적인 사건을 다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도 한다. 푸르미는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나가게끔 만드는 방식의 해고를 추진한다. 이것보다 분노를 더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설정하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노동법 등 노동문제를 이야기로 풀어 가기 위해서는 사건의 전개를 천천히 가져가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폭력적으로 해고가 일사천리로 전개되는 사업장은 짧은 시간 안에 노동 이야기를 풀어야 하기 때문에 소재로 적절하지 않다고 봤다.”

“공적인 정의로움 추구하는 주인공 표현하고 싶다”

- 만화를 무기로 활용하는 것인가.

“공적인 정의로움에 초점이 맞춰진 캐릭터가 주인공인 작품은 거의 없지 않나. 정의라 하더라도 사적인 복수인 경우가 많다. 공적인 캐릭터를 잘 표현해 보고 싶었다. 요즘 세상에 들고나오기에는 촌스러운 캐릭터이긴 하다. 독립운동가를 요즘 세상에 데리고 나온 것과 같다. 요즘 정의의 용사 캐릭터가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있다.(웃음)”

- <송곳>은 스스로 세운 원칙을 고지식하게 지키는 이수인이 주인공이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장교 출신의 유통업체 과장인데. 결말은 해피엔딩인가.

“파업이 승리하는 것으로 결론 나지 않겠나. 하지만 슬플 것 같다. 이수인은 투쟁의 과정 속에서 변화하게 된다. 자기가 지켜 왔던 원칙을 배신하고, 아마 성격도 안 좋아질 것이다.(웃음) 희생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이런 변화가 과연 이수인 개인에게 긍정적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 작품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나.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이상하다, 이 정도 감정만으로 그리려니 많이 힘들다.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다. 알고 지내는 활동가 분들이나 변호사·노무사들에게 계속 도움을 받고 있다.”

- 만화가는 청소년의 우상이다. 그런데 최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아쉽지 않나.

“우상이 될 수는 없다. 다 챙기고 어찌 사나.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살아야지.(웃음) 그래도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작가였다면 <송곳> 같은 작품을 할 때 더 좋았을 것 같다. 더 효과적이지 않겠나. 그런 점에서는 아쉽다. 장르문법에 더 충실한 작가였다면, <송곳>의 주제를 훨씬 대중적으로 잘 풀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 어떤 인터뷰에서 "학교는 장사꾼이 됐는데 학생은 학생으로 남아 있으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송곳>에 맞게 재구성하면 "그들은 나에게 노예로 남아 있으라 한다"로 바꿀 수 있을까.

“임금노동자 자체가 노예는 아니다. 노예냐 아니냐보다는 얼마나 노예냐, 얼마나 아니냐가 중요한 것 같다. 생각과 행동을 자기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게 되고, 내가 행동했을 때 처벌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의 기준이 계속 흔들리고 있는 사회다. 그런 상태가 되면 노예가 된 것이다. 세상이 점점 우리들에게 노예가 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사회와 연결된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것”

- 전작 <100℃>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등을 보면서 사회문제를 잘 표현하고 다룬다는 느낌을 받았다.


“<송곳>이 좀 강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이전 작품은 사회문제를 다룬다는 생각으로 한 것은 아니다. 사람문제를 다룬 것이다. 사회와 연결된 사람을 다루는 것을 좋아한다. 사회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캐릭터가 아니라 사회와 함께 움직이는 캐릭터를 찾고 보는 것을 즐긴다.”

- 웹툰이다 보니 독자 반응이 댓글에서 바로 확인된다.

“자기가 일하면서 겪었던 사연을 올리는 분들이 계시다. 엄청 좋다. 자신이 회사에서 겪었던 노동이란 주제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꺼내 놓을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다. 우리 상사 나쁜 놈이 아니라 월급을 제때 못 받았다거나, 산재 처리가 안 됐다는 등의 이야기가 올라온다. 이런 이야기들을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외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 <매일노동뉴스>가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나.

“노동문제에 대한 궁금한 일이 있거나 정확한 정보를 알기 위해 자주 찾는다. 즐겨찾기가 돼 있다.(웃음)”

글=제정남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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