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말레이시아 노동조합운동 지도자들을 만났다. 노동운동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 물었다. 단체교섭 교육과 노조 조직화 교육, 노동운동 지도자 교육이 필요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들 교육에서 어떤 과목을 다뤘으면 좋겠냐는 주제를 토론에 부쳤다.

단체교섭 교육에서 다뤄야 할 과목으로는 단체교섭과 단체협약의 역사, 단체협약이란 무엇인가, 단체교섭 관련 노동법, 단체교섭 준비, 교섭기술, 기업경영 분석, 임금이란 무엇인가(임금구조와 체계), 단체교섭의 목표가 나왔다. 노조 조직화 교육에서 다뤄야 할 과목으로는 조직 대상 분석, 조직 대상과 만나는 방법,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좋은 점, 선전물 준비, 조직화 시간표 만들기,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고 조직하는 방법, 노조 결성과 관련한 노동법이 제기됐다. 노동운동 지도자 교육에서는 국제노동운동의 역사, 말레이시아 노동운동의 역사, 국제노동기준이란 무엇인가, 국제노동기준을 현장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자유무역협정(FTA)이란 무엇인가, 국제노동조합의 현황과 과제, 각종 통계와 자료를 정리하는 방법, 연설기법, 지도자의 비전과 임무가 주요 과목으로 다뤄져야 한다고 했다.

흥미를 끄는 대목은 노동운동사와 단체교섭사 같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그에 대한 교육 요구가 크다는 점이다. 말레이시아 노동운동이 ‘테크닉’한 교육을 넘어 이념적인 내용과 구조적인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교육을 지향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풀이할 수 있겠다.

말레이시아 노사관계는 미국식이다. 노동권을 제한하고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노동체제인 것이다. 노동조합법에 따른 노조인정 비밀투표가 대표적이다. 회사가 채용한 전체 종업원 가운데 과반이 넘는 지지(50%+1)를 받아야 노조가 인정된다. 말레이시아 노동력의 30%가 외국인 노동자다. 당연히 이들도 노조인정 투표의 대상이다. 사용자는 외국인 노동자를 송환시킬 수 있는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사업장 안에 설치된 투표장에 가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말레이시아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회사는 곳곳에 설치된 CCTV와 배치된 관리자들을 통해 누가 투표장에 오는지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노조인정 투표를 앞두고 직간접으로 압력을 가한다. 투표 결과에 대한 보복과 해고는 비일비재하다. 결사의 자유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법 체제와 관행을 그대로 둔 이상 조직확대는 불가능하다.

단체협약에 인사경영권(management's right) 조항을 넣는 것도 미국식 노동체제의 또 다른 사례다. 사용자의 전횡과 독단을 규제하기 위해 인사경영권을 제한하고 구속하는 내용의 조항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인데, 현실은 정반대다. 대부분의 단체협약은 “노조는 모든 영역에서, 특히 노동력의 수와 작업 내용의 결정, 작업 규정과 안전 규칙의 제정, 노동력의 효율적 사용과 생산을 위한 수단·도구·재료·방법·과정·일정의 결정, 종업원에 대한 승진·감원·전직·방출·정직·징계 등 (…) 사업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회사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조항을 두고 있다.

당연히 단체협약에서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 보장 △노동자 경영참가 △회사 정보의 공개 등 노동자의 권리와 관련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단체협약에서 노동자의 이익만 다루고 노동자의 권리는 내팽개치니, 결국 노동자의 이익도 그림의 떡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말레이시아 국민경제는 날로 부유해지는 데 반해, 노동자들은 점점 가난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말레이시아는 1인당 국내총생산 대비 노동자 임금이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한다.

노동운동을 둘러싼 사정이 이러한데도, 말레이시아 노동조합 간부들은 “법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한다”는 타령만 늘어놓기 일쑤다. 노동조합의 투쟁을 봉쇄한 법률을 인정하고서 ‘합법주의·법률중심주의’에 갇혀 노조활동을 하다 보니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고 이익을 개선하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 조직력 강화에 투자돼야 할 노조 재정이 변호사 같은 법률전문가들의 주머니로 흘러갔다. 노동조합 교육훈련에서 ‘역사’ 과목을 신설해야 한다는 말레이시아 노조간부들의 요구는 이런 현실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많은 한계에도 말레이시아 노동조합운동의 미래는 낙관적이다. 노동전선이 말레이시아노총(MTUC)으로 통일돼 있다. 기업별노조 중심인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산업과 업종을 중심으로 한 노조체제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테크닉’에 능한 노조기술자를 넘어 역사와 구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진 의식분자를 양성하는 노동교육이 결합된다면, 밝은 미래가 한걸음 가까워질 것으로 보인다. 말레이시아 노조 지도자들과의 대화와 토론에서 한국의 노동교육을 돌아보게 된다. 세계노동운동의 역사, 한국노동운동의 역사, 단체교섭과 단체협약의 역사, 노동법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제대로 교육하고 있는가.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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