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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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전국민주연합노조의 별

전국으로! 전국으로!·‘백약이 무효’라던 옥천, 승리하다·강원도의 힘·“김 부위원장, 장(腸)에 뭔가 잡히는 게 있네”·흔들리는 민주노총·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부터 멀어지다·마침내 올린 전국민주연합노조의 깃발·달밤 블루스·“여기는 1호차, 2호차 나와라, 오버~”·이랜드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현장을 지키는 노동자 국회의원·우리의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LANDS, UNITE!)”·귀여운 막둥이가 노동운동가로·너무나 갑작스러운, 너무나 애통한 죽음·남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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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갑작스러운, 너무나 애통한 죽음

베트남과 태국에 갔다 오고 나서 김헌정의 몸은 더 나빠졌다. 한동안 꼼짝도 못했다. 누워 있으면서도 김헌정은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안 죽는다. 섭생을 잘하고, 장두석 선생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따르면 완치는 아니더라도 움직이는 데는 불편함이 없을 거다. 죽을 때까지 암이란 녀석을 친구로 데리고 살면 되겠지.”

이게 김헌정의 마음이었다.

겨우 몸을 추스른 김헌정은 조합원들이 보고 싶었다. 의정부의 ‘역전의 용사들’이 보고 싶었다. 김헌정은 나천봉 부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부위원장은 전임을 그만두고 현업에 복귀한 상태였지만 김헌정의 흔치 않은 전화인지라 일도 안 끝내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조합원이 운영하는 갈빗집이었다. 김헌정이 소주를 시키자 나 부위원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헌정은 회식자리에서도 술잔을 입에 대기만 하고 마시는 시늉만 냈다. 그런 김헌정을 아는 나 부위원장은 기분이 이상했다.

몸이 망가지면서 김헌정은 술을 입에 대는 일이 잦아졌다. 원래가 술이 안 받는 체질이라 남들처럼 빈 병을 세지는 못 하지만 석 잔 털어 넣을 정도는 됐다.

“부위원장님, 우리가 할 일 다 했지 않습니까? 홍희덕 국회의원 만들었고, 부위원장님 모시고 일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나 부위원장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하고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아이, 어디 떠나요?”

순간 실수한 것을 깨달은 김헌정은 말을 얼버무렸다.

“제가 가긴 어디를 갑니까. 부위원장님 곁에 항상 있지요.”

목욕을 함께하고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그해 연말 김헌정은 기동을 하지 못했다. 화장실에서 피를 쏟고 쓰러졌다. 김헌정은 우울했다. 새해가 돼서야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팔다리가 조금씩 말을 듣는 것 같았다. 친구 김장호 씨와 북한산에 갔다. 김장호 씨는 1년 전 암 진단을 받고 경주에서 요양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의 좋아진 모습을 본 김헌정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도 곧 저렇게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둘은 예전 학생운동을 하던 때로 돌아가 가두시위 준비하듯이 암을 물리칠 작전을 짜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김헌정은 동두천시대학생회 선배인 이강기 씨 집에도 갔다. 이강기 씨 내외와 저녁을 먹었다. 병색이 완연한 후배의 몰골을 보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선배 앞에서 김헌정은 한참 동안 ‘상황 보고’를 했다.

“여기저기 다 아픈 건 사실이지만 자신이 있습니다. 암세포라는 게 스트레스를 받고 그러면 확 퍼진다는데 나는 면역력을 높이는 위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습니다.”

김헌정의 말을 듣고 나서야 이강기 씨의 표정이 다소 풀렸다.

2월 들어 정년퇴직을 한 나천봉 부위원장과 의정부지부 조합원들이 찾아왔다. 열세 명이나 왔다. 김헌정의 소식을 들은 나 부위원장이 조합원들을 모았다. 그 무렵 김헌정이 암에 걸렸다는 걸 모두들 알고 있었다. 덕정리에 나가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김헌정이 계산대 앞으로 가려는데 나 부위원장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계산을 마친 나 부위원장은 봉투 하나를 막무가내로 김헌정의 호주머니에 우겨넣었다.

“다 들었어요.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약값에 보태라고…….”

나 부위원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4월 18일은 한미FTA에 반대하며 당신의 몸을 불사른 허세욱 열사의 4주기였다. 홍희덕 의원이 허세욱 열사 영전에 명예당원증을 바치러 간다는 소식을 들은 김헌정은 양미경과 함께 모란공원에 갔다. 봄이 되면서 몸이 조금 나아졌다고 김헌정은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었지만 그의 육신은 서서히 말라 가고 있었다. 김헌정은 식이 끝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식당으로 내려왔다. 숨이 찼다. 식당으로 홍 의원님과 조합 간부들이 왔다.

김헌정은 홍희덕 의원을 볼 때마다 죄송했다. 너무나 큰 짐을 안겨 드렸다. 짐을 안겨 드렸으면 나눠서 함께 져야 하는데, 나는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 누워 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인가.

홍 의원은 부부를 앉혀 놓고 정색을 하며 병원에 가라고 일렀다. 홍 의원은 단단히 다짐을 받을 심산이었는데 김헌정은 그저 “많이 좋아졌습니다”라는 대답만 했다.

김헌정은 집에 누워 있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마침 그에게는 4월 28일 광주의 민족생활학교에서 강의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래, 장두석 선생님도 뵙고 동지들도 만나는 거야!”

그는 아내에게 광주에 간다고만 말하고는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4월 27일 집에서 나온 김헌정은 인천에 있는 대안학교인 마리학교를 찾아 견학을 했다. 그날 밤은 마리학교에서 잤다. 다음 날 광주에 도착한 김헌정은 점심을 전국회의 동지들과 함께한 뒤 민족생활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주제는 ‘즐거운 노동과 건강한 생활’이었다. 김헌정은 2005년부터 강의를 해 왔다. 그다운 주제였다.

강의가 끝난 뒤 장두석 선생과 대화를 나눴다. 장 선생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며 병원에 가서 복수부터 빼라고 신신당부했다. 장 선생은 김헌정의 몸을 덮치는 사신(死神)의 그림자를 발견했던 것일까. 민족생활학교를 나와 의정부로 갈 생각을 하자 김헌정은 답답했다. 불현듯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김헌정은 차를 남해로 돌렸다.

남해에는 현관 스님이 있다. 현관 스님은 남해 중생사의 주지스님이다. 현관 스님과 김헌정은 민족생활학교에서 만났다. 현관 스님도 암으로 고생했다. 현관 스님이 암을 이기자 주변에서는 기적이라고들 했다. 평소 많은 대화를 나눈 사이는 아니었지만 언제든 놀러오라던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날 오후 늦게 남해에 도착한 김헌정은 현관 스님과 금산에 올랐다. 현관 스님은 금산 뒤편에 석양을 보면서 막걸리를 한잔할 수 있는 식당이 있다고 했다. 김헌정은 기뻐서 스님 뒤를 쫓았지만, 결국 도중에서 내려와야 했다. 김헌정이 주차장 입구에서부터 힘들어했다는 게 현관 스님의 말이다. 스님은 김헌정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몰랐다.

금산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김헌정은 남해를 퍽 마음에 들어 했다. 현관 스님에게 경치가 너무 좋다며 며칠 단식하다 올라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스님이 쾌히 응낙을 하자 김헌정은 친구 김장호 씨와 최만정 충남일반노조 위원장에게 놀러오라고 전화까지 했다. 최 위원장도 김헌정과 동갑내기 친구다. 그런데 둘 다 사정이 있어 가지 못했다.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3일 동안 김헌정은 남해 중생사에서 단식을 하며 몸과 마음을 달랬다. 기분이 한결 좋아진 듯했다. 5월 2일은 일요일이었다. 단식을 끝낸 김헌정은 양미경과 통화를 했다. 광주에 간 줄로만 알고 있던 양미경은 김헌정이 남해라고 하자 깜짝 놀랐지만 최근 들어 처음 듣는 남편의 밝은 목소리에 안심을 했다.

김헌정은 스님에게 노조 이야기도 해줬다. 안양의 선별장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이 해고됐는데 다섯 명이 끝까지 남아 복직투쟁 중이라고 했다. 김헌정은 해고는 살인이나 마찬가지라며 조합원들을 걱정했다. 다음 날 김헌정의 상태가 갑자기 악화됐다. 아랫배를 부여잡고 엎드려서 끙끙 신음만 흘리는 김헌정을 보고 스님은 놀랐다. 스님이 장두석 선생에게 연락을 하려 하자 김헌정은 그 아픈 와중에도 손을 내저으며 전화를 하지 마시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저녁 10시쯤 아내 양미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와는 달리 갈라질 대로 갈라진 남편의 목소리에 아내는 덜컥 겁이 났다. 내일 당장 달려가겠다는 아내에게 김헌정은 “어서 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5월 4일 화요일 동이 트기 시작했다. 김헌정은 이틀째 한 숨도 못 자고 통증과 싸우고 있었다. 김헌정은 통증이 약간 줄어들 때마다 그의 곁에서 간호를 하던 스님을 올려보며 “미안해요”라고 입술을 달싹였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정신력이었다. 이날 현관 스님은 죽음의 고통에 사람이 허물어져 내리는 모습을 봤다.

현관 스님은 어쩔 줄을 몰랐다. 어제만 해도 멀쩡해 보이던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줄이야. 스님은 김헌정의 고집을 따른 것을 방바닥을 치며 후회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기 다이얼을 눌렀다. 앰뷸런스라도 불러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을에 다리 공사가 있었다. 10분이면 도착할 앰뷸런스가 오지 않았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스님은 앰뷸런스를 기다리며 필사적으로 김헌정을 감싸 안았다. 앰뷸런스가 도착했을 때, 김헌정의 숨은 이미 끊겨 있었다. “미안해요”가 이승에서 그의 마지막 말이 됐다. 2010년 5월 4일 오전 7시 10분 전국민주연합노조 부위원장 김헌정은 죽었다. 그의 나이 만 45세였다.

남은 사람들

너무나 갑작스러운, 너무나 애통한 죽음이었다. 온기가 그대로 남은 김헌정의 몸은 앰뷸런스에 실려 남해병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김헌정이 사망했다는 의학적 소견을 들은 현관 스님은 곧바로 장두석 선생에게 연락을 했다.

남해로 갈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던 양미경의 전화가 울렸다. 장두석 선생이었다. 남편을 간호하러 떠나려던 길이 황망하게도 먼저 간 부군의 시신을 모시러 가는 길이 됐다. 양미경이 정신을 놓치면 안 됐다. 그는 떨리는 손길로 조합 간부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광희 위원장·이미숙 부위원장·배홍국 부위원장·김정헌 통일국장이 따라나섰다. 나머지 간부들은 의정부 노조사무실에 모여 장례를 준비하기로 했다.

남해병원에 도착하자 최만정 충남일반노조 위원장과 강동화 일반노조(경남) 위원장이 눈물범벅이 된 채 그들을 맞았다. 병원에 도착한 양미경에게는 이 믿겨지지 않는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잔인한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5월 4일 밤 10시 김헌정의 시신은 의정부로 돌아왔다. 의정부의료원 영안실은 비보에 접한 조합원들, 김헌정의 가족·친구·지인들 그리고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선후배 동료들로 가득 찼다.

전국민주연합노조 임원들은 울면서 상주 역할을 맡았다. 영정으로 쓸 사진도 없었다. 이경수 선전부장이 사진을 골라냈다. 그런데 그대로는 쓸 수가 없었다. 사진 속의 김헌정은 우비를 입고 있었다. 포토샵으로 우비를 긁어내는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던 이 부장의 낯이 흐려졌다. 이 사진은 그가 찍은 것이었다.

김헌정은 어느 날 지방으로 출장을 가다가 우연히 의정부 길가에서 진흥화 전 의정부지부장을 만났다. 김경영 씨의 죽음을 계기로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를 만들 때 민주노총 사무실을 두드렸던 두 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날도 비가 왔다. 진흥화 전 지부장을 발견한 김헌정은 난데없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김헌정은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다. 우비를 입은 김헌정과 노란색 작업복을 입은 진흥화 전 지부장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이 영정사진이 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김헌정을 떠나보내는 3일장 내내 조합원들은 울었다. 울음이 그치면 술병을 잡고, 그러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울고……. 그들에게 김헌정은 ‘사령관’이자 동지였다. 김헌정은 항상 조합원들에게 깍듯했지만 곁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행여나 노조 내에 작은 파벌이라도 생길까 노심초사하던 그였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들 외에는 없다는 것을.

정년퇴직한 김영철 전 부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김헌정이 이 나쁜 놈! 늙은 우리보다 먼저 죽었어. 반주 한잔하자고 할 때 그게 아파서 그랬던 거야. 그때 알았어. 그런데 병원 가자는 소리를 할 수가 있어야지.”

독한 소주를 물처럼 들이켜는 김영철 전 부위원장의 독백에 홍희덕·나천봉·김윤조·문공달·이상관·이준휘 등 ‘역전의 용사들’은 가슴을 치며 비통해했다.

젊은 축들은 그들대로 각자 가슴에 새겨진 김헌정과의 인연이나 마지막 추억을 되새기며 슬퍼했다.

“언젠가 회의를 하는데 김헌정 부위원장과 의견이 맞지 않은 적이 있었어. 심통이 나서 회의를 파했더니 우리 집에까지 찾아왔어.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셨지. 부위원장도 마셨어. 그러고 나서 풀었는데 그 뒤에 들으니 부위원장이 아프다는 거야. 나 때문인가 싶어 문자를 보냈더니 그런 거 아니니까 안심하라고 답신을 보내주시더라고.”

김기현 동해지부장의 말이었다.

김 지부장은 이런 일화도 덧붙였다.

“부위원장이 동해에 온 김에 물질하는 조합원들이 직접 잡은 돌문어랑 전복을 아이스박스에 쌌어. 집에서 드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그걸 또 사무실로 갖고 간 거야.”

‘백약이 무효’라던 옥천의 승리를 이끈 주역인 오대성 부위원장은 “위원장이 옥천으로 찾아와서 승현이랑 같이 밥 먹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승현이는 오대성 부위원장의 아들로 옥천투쟁 당시 천막농성 붙박이로 조합원들과 함께 지냈다. 오 부위원장이 “부위원장이 노조활동을 오래하려면 집안 문제를 잘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자 젊은 간부들을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권용희 조직국장도 나섰다.

“부위원장이 조합원 교육하는데 깜짝 놀랐어. 칠판에 미사일을 하나 그리더니 북핵 문제를 막 얘기를 해. 조합원들은 또 진지하게 들어.”

편견을 깨는 노조활동을 열정적으로 실천한 그가 그립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그랬다. 김헌정의 꿈은 노동해방과 조국통일이었다. 김헌정은 이를 막는 그 어떤 편견에도 반대했다.

하늘도 김헌정의 죽음이 아쉬웠던지 비를 뿌렸다. 조합원들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눈물과 술이 한데 엉킨 술잔을 밤새도록 비웠다. 하지만 임원들은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김헌정이 가는 마지막 길을 그들이 지켜야 했다. 의정부의료원에서 운구를 모시고 출발해 가두행진으로 의정부시청 앞 평화공원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노제를 치른다는 게 노조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시청과 경찰에서 안 된다고 나오는 것이었다. 임원들은 핏발이 선 눈길로 그들을 쏘아보며 부르짖었다.

“막을 테면 막아라! 언제 우리가 남의 힘 빌려서 투쟁했냐!”

노조는 가두행진과 노제를 밀어붙였고 시청과 경찰은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5월 6일 오전 김헌정의 영구(靈柩)는 의정부의료원을 빠져나와 의정부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정부시청 앞 평화공원에 도착했다.

전국민주연합노조 부위원장 김헌정 열사 영결식이 공원을 가득 메운 녹색조끼 물결 앞에서 엄숙히 거행됐다. 영결식은 문공달 장례위원장의 인사를 시작으로, 전순영 부위원장의 열사 약력보고, 민주노동당 이수호 최고위원·이미숙 부위원장·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민주노동당 홍희덕 국회의원의 조사, 노동가수 박준 씨의 추모가, 최봉현 부위원장의 추모사, 이광희 위원장의 호상 인사, 민족춤패 ‘출’의 진혼굿 순서로 진행됐다.

노제가 끝났다. 영결식에 참석한 이들은 김헌정의 영구를 모시고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녹색조끼를 입은 조합 간부들의 운구로 김헌정은 생전에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열사들 곁에 묻혔다.

김헌정이 이승에서 마지막 숨을 쉬는 그 순간에도 걱정했던 안양 청소업체에서 해고된 조합원 5명은 2010년 6월 1일 복직이 됐다. 안양 조합원들은 “김헌정 열사의 선물”이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전국민주연합노조는 2010년 6월 23일 조합원총회를 통해 김헌정열사추모사업회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전 조합원이 임금에서 매달 1천원씩 공제해 추모사업기금을 마련하기로 했다. 노조는 이 기금을 김헌정처럼 노동자 권익향상과 사회의 민주화,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하고 투쟁하는 운동가들의 자녀장학금으로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김헌정열사추모사업회는 김헌정 열사 1주기를 맞아 서맹섭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장, 오수영 전국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장, 권락기 통일광장 대표, 김영희 노들장애인자립재활센터 소장의 자녀들에게 장학증서를 수여했다.

2010년 12월 노조는 6천만원을 사회공헌기금으로 조성해 비영리단체 행복한나눔센터를 설립했다. 조합원들은 김헌정의 말대로 “돈 때문에 노조를 하는 게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는 것을 실천했다.

행복한나눔센터는 의정부 회룡역 근처에 행복한국수 가게를 내고 영업이익금으로 근처 임대아파트와 노인정에 한 달에 2∼4번 찾아가 국수를 대접한다. 이때는 조합원들과 부인들도 자원봉사자로 나온다. 또 행복한국수 가게의 수익금은 이주노동자 지원사업과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도 쓰이고 있다.

김헌정이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던 의정부지부의 조합원들은 가끔 행복한국수 가게 옆 정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신다. 그러다 보면 2000년 파업투쟁의 무용담이 나오고 김헌정이 떠오른다.

김헌정이 칭송해 마지않던 ‘우리 노조의 영웅들’은 이제 조합원은 아니지만 진보정당 복원과 진보정치 재건을 위해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김영철 전 부위원장은 2010년까지 민주노동당 경기도당 부위원장으로 활약했다. 김윤조 전 의정부부지부장은 홍희덕 의원의 2012년 선거운동을 적극 도왔다. 이상관 전 부위원장은 전남 장흥으로 귀농해서 장흥지역위원회의 농민 당원들과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까지 다닌다. 홍희덕 전 국회의원은 2012년 4월 총선에서 의정부을 지역구 통합진보당 후보로 선전했으나 아깝게 패하고 말았다.

김헌정의 아내, 양미경은 2012년부터 행복한국수 가게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이 국수가게의 주방장은 고 김경영씨의 부인 이정자씨다. 그들의 바람은 전국민주연합노조의 지부가 있는 곳에 계속 지점을 내는 것이다. 김헌정의 두 딸 송하와 윤하는 예쁘게 자라났다.

2012년 3월 현재 전국민주연합노조의 조합원은 2천500명이 넘는다. 김헌정은 떠났지만, 그가 뿌린 씨앗대로 전국민주연합노조는 민주노총 내에서도 가장 열심히 연대투쟁을 실천하는 노동조합으로서 오늘도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살아서는 전국민주연합노조의 ‘사령관’이었던 김헌정. 그는 죽어서 전국민주연합노조의 ‘별’이 됐다.

작가 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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