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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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전국민주연합노조의 별

전국으로! 전국으로!·‘백약이 무효’라던 옥천, 승리하다·강원도의 힘·“김 부위원장, 장(腸)에 뭔가 잡히는 게 있네”·흔들리는 민주노총·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부터 멀어지다·마침내 올린 전국민주연합노조의 깃발·달밤 블루스·“여기는 1호차, 2호차 나와라, 오버~”·이랜드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현장을 지키는 노동자 국회의원·우리의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LANDS, UNITE!)”·귀여운 막둥이가 노동운동가로·너무나 갑작스러운, 너무나 애통한 죽음·남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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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김헌정의 체력은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 스스로도 휴양이 필요하다고 인정해 휴직을 신청했으면서도 그는 좀처럼 일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못 말릴 성격이었고 못 꺾을 고집이었다. 김헌정은 집에서 가만히 누워 있지를 못했다.

2008년은 그에게는 정말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고 2009년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두 해 동안 김헌정은 전국민주연합노조의 일상활동에서 비켜나 있었다. 그는 집 밖으로 나가서 그동안 못 만났던 조합원 동지들을 찾는 한편 노조의 중장기 과제로 설정해 뒀던 일들을 끄집어냈다.

김헌정은 평소부터 노동조합의 교육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조가 안정화되면서 여유가 생기자 ‘살아 있는 교육’을 지향했다. 역사기행을 기획해 남쪽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남도’ 제주도로부터 북쪽으로는 민족의 비원(悲願)이 서린 비무장지대 철원까지 찾아가야 할 곳은 다 다녔다. 조합 간부들을 민주노총의 방북 프로그램에 참여시킨 것도 이런 발상에서였다.

이와 함께 전국민주연합노조는 조합 간부들에게는 일본·홍콩 등 원정투쟁이나 해외연수, 국제노동교류의 기회를 계속적으로 제공했다. 김헌정은 노조의 교육과 국제사업을 접목시켜 조합원들의 시각이 국내에만 한정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신자유주의에 맞서고 한미FTA를 저지하려면 조합원들부터 국제감각을 갖춰야 했다. 전 세계의 ‘노동자는 하나’였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이 되는 2009년 1월 김헌정은 전현직 간부들과 중국 하얼빈을 2박3일 방문했다. 그의 제안이었다. 방문기간 이들은 뤼순감옥·안중근기념관·731부대 등을 견학하고 하얼빈조선족노인회 등과 면담했다.

김헌정은 퇴직하는 조합원들에게 “퇴직금, 자식들에게 주시면 안 됩니다”라는 얘기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주 건네곤 했다. 형편이 되면 여행도 하면서 편히 지내시라는 뜻인데, 하얼빈 역사기행에는 퇴직한 김영철 전 부위원장·이상관 전 부위원장 등도 함께 갔다. 퇴직 간부들은 뜻 깊은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무엇보다 김헌정과 함께 여행한다는 점에서 아주 흡족해했다.

하지만 국제 문제에 관한 조합원들의 관심은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총은 끊임없이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배치했지만 똑같은 슬로건을 반복한다고 해서 조합원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김헌정은 간부들이나 조합원들이 세계노동운동의 주요한 흐름은 무엇인지, 세계의 노사정들은 무엇 때문에 갈등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교육과 국제사업의 접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무렵인 2009년 1월 김헌정은 ICEM(국제화학에너지광산일반노조연맹)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윤효원 씨를 찾아 민주노총의 국제사업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은 국제노동사업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는데 뜻이 잘 맞았다.

우리나라 노동계의 국제교류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양쪽 다 현장의 조합원과 유리돼 있다는 데 두 사람은 의견일치를 봤다. 한국노총의 국제사업은 상층간부 중심의 노동외교의 성격이 강하고, 민주노총 쪽은 노동운동보다는 시민운동의 성격이 강해 조합원들이 참여하기에는 학술적 성격이 짙다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면서 윤효원 씨는 당시 그가 진행하고 있던 ICEM의 ‘아시아 다국적기업과 사회적 대화’라는 프로그램에 전국민주연합노조가 참여해 보라고 제안했다.

이 프로그램은 ILO 협약이나 OECD 가이드라인 같은 노사정 3자가 합의한 국제기준이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노동현장에서 지켜지는가에 대한 실태조사를 하고, 이 지역의 노조들이 이 기준을 어떻게 노동조합 활동에 활용할 수 있는지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1년에 30∼50회, 1회에 2박3일씩 진행되는 교육에 말레이시아·태국·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6개국의 단위노조 간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휴직으로 노조의 일상적인 업무에서 벗어난 김헌정은 11월 중순께 전국민주연합노조 법률부장이던 이수현 노무사와 함께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태국으로 향했다. 참가비용은 프로그램에서 지원을 했고 노조는 교통비만 부담하면 됐다. 김헌정은 비행기 값을 아끼기 위해 베트남을 경유해서 방콕으로 가는 편을 택했다. 미국과 싸워 이긴 베트남이라는 나라를 잠시라도 둘러보고 싶었던 게 김헌정의 속마음이었다.

김헌정과 이수현 노무사는 한국을 떠난 첫날 베트남 호치민시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호치민시에서 머무는 동안 김헌정은 전쟁기념관과 호치민혁명기념관 등을 둘러봤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호치민시에서 출발해서 오후 1시 방콕에 도착했다. 2박3일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강의를 듣고 동남아시아에서 온 단위노조 간부들과 대화를 나눴다. 프로그램 마지막 날 전국민주연합노조의 사례를 발표하는 순서가 있었다.

사례 발표를 준비하면서 윤효원 씨는 가능하면 영어로 발표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김헌정에게 권했는데 그는 단번에 응낙했다. 대개 한국의 노동운동가들은 영어로 의사소통을 가능하더라도 통역을 부탁하는데 김헌정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학원을 할 때 중학생들 영어를 가르쳤다”고 하면서 영어로 발제를 할 준비를 했다. 윤효원 씨는 이러한 김헌정의 자세에 대해 “국제노동사업에서 적극성이나 진취성을 보여 주는 면모”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막상 사례 발표할 시간이 됐는데 김헌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윤효원 씨가 찾아 나섰더니 김헌정은 호텔 모퉁이에서 서서 노트북을 들고는 입을 크게 벌려 발음을 확인해 가며 영어로 발제할 내용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도 약간은 긴장이 됐던 모양이다.

김헌정은 파워포인트를 활용해서 1시간 동안 발제를 하고 한국에서 준비해 간 전국민주연합노조의 활동 상황을 찍은 비디오까지 보여 줬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동남아시아의 단위노조 간부들은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유럽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사례 발표는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동남아시아의 노조들은 말레이시아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처럼 기업별 노조이고 사용자 측에 비해 노조의 힘이 강하지 못했다.

자신들처럼 힘이 약한 환경미화원들이 노조를 통해 단결하고 노동자로서 권리를 찾으면서 정치세력화까지 이뤄낸 드라마는 그들에게 생생한 감동으로 다가갔다. 윤효원 씨가 전국민주연합노조의 민간위탁 저지투쟁 덕분에 환경미화원들의 임금이나 노동조건, 복지가 향상이 돼서 요즘 대한민국에서는 대졸자도 서로 환경미화원들이 되려고 한다는 설명을 덧붙이자, 그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국민주연합노조의 사례 발표를 들은 동남아시아의 단위노조 간부들은 김헌정에게 열띤 질문공세를 펼쳤다.

“당신도 구속이 된 적이 있느냐?”

“국회의원이 된 환경미화원은 노조와 당을 배신하지 않았느냐?”

노동조합 활동가의 변절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김헌정은 이 프로그램이 노동시간의 문제, 단체교섭, 노동자의 경영참여 등 핵심적인 이슈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다. 프로그램 참여를 전국민주연합노조의 정례적인 사업으로 만들겠다며 이를 시작으로 국제노동사업에 뛰어들 여러 가지 구상을 했다. 그는 영국 최대의 공공서비스노조인 유니손의 청소노동자 조직현황에 대해 알아보자고 하면서 윤효원 씨에게 유니손을 탐방하자는 말도 꺼냈다.

김헌정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베트남을 경유했다. 이번에는 하노이였다. 그 짧은 시간에 베트남 군사역사박물관과 호치민의 묘소가 있는 나딘광장 등을 둘러보면서 이수현 노무사와 호치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매사 호기심도 많고 국제노동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던 김헌정은 ICEM의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몇 달 전인 2009년 여름 유럽에도 다녀왔다. 프랑스 파리에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는 임경복 당원을 만나 국제노동운동의 사정을 들었다. 김헌정은 영국에도 들렀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LANDS, UNITE!)”라는 구호가 새겨진 마르크스의 묘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쉰다고 해 놓고는 국제노동사업을 구상하면서 해외출장까지 나온 김헌정이었지만 방콕에서 그의 몸은 좋지 않았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화장실에 들락날락거렸고, 새벽녘이면 배를 감싸고 엎드려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기진맥진해서 한동안 운신조차 힘들어 누워만 있어야 할 지경이 됐다. ICEM의 ‘아시아 다국적기업과 사회적 대화’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베트남을 경유해 태국을 다녀온 게 전국민주연합노조 부위원장 김헌정의 마지막 노조활동이 되고 말았다.

귀여운 막둥이가 노동운동가로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특별히 얘기할 게 없다는 사람이었다. 내가 나를 숨기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늘 나보다는 타인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고, 그 관심을 실천하려 애쓴 만큼 세상에 대해 할 말이 점점 더 늘어났다.

내가 노동조합을 시작한 뒤로는 굳이 내 얘기를 할 필요가 없게 됐다. 나는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사람이 아니므로 조합원들은 행동을 보고 나를 알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를 더 알고 싶지 않았을까. 내 부모는 어떤 분들이고, 내가 어디에서 나고 어떻게 자랐는지 말이다. 혹시 내 착각일까. 착각이 아니길 빌며 이 글을 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포천시 관인면 중리다. 아버지의 함자는 김석후다. 아버지는 경북 영천 사람으로 19세가 되던 해 6·25 동란이 일어나서 군대에 입대하게 됐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버지는 군대에 남아 11사단에서 하사관으로 근무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도 먹고살 길이 막연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아버지, 즉 내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 고향에는 홀어머니와 형님, 누님께서 근근이 살고 계셨다. 전쟁 이전에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이후라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군대에 남기로 했을 때 고향을 떠나더라도 장가는 가라는 할머님의 부름을 받았다.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는 혼례를 올렸다. 영천에서 10km정도 떨어진 금호에 사는 처녀였다. 내 어머니의 함자는 성분찬이다. 아버지보다 두 살 아래셨다.

아버지는 혼례만 올리고 다시 군대로 복귀했다. 어머니는 고향에 남아 할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1956년에 큰누나 영자를 낳았다. 아이가 생긴 아버지는 부대가 있던 연천군 관인면(현재 포천시)에 살림집을 마련하고 어머니와 큰누나를 불러 올렸다.

아버지는 중사로 제대한 뒤 부대 근처에 조그만 점방을 내고 장사를 시작했다. 워낙 부지런하고 성실했던 아버지는 살림을 불려 GMC 트럭을 마련했다. 농민들이 수확한 옥수수를 트럭에 싣고 나가서 부려 놓고, 동두천의 규석광산에서 나오는 규석을 싣고 서울로 나른 뒤 돌아올 때는 이문동의 연탄공장에서 연탄을 들여와서 팔았다.

GMC 트럭 한 대로 시작한 운수업과 도매업이 잘 돼서 아버지는 동두천으로 이사를 나왔다. 8톤 트럭, 10톤 트럭을 들여놓았다. 아버지는 이 트럭들을 쉴 새 없이 굴리기 위해 연탄도매업·벽돌공장·샤니케익·현대요구르트 등 각종 도매상을 운영했다.

집안도 편안했다. 큰누나 바로 아래로 둘째누나 헌숙, 형 헌도, 막내누나 하연이가 두 살 터울로 태어났다. 막내인 내가 세상에 나온 날은 1964년 7월 15일이었다. 누나들은 엄마가 막내동생을 낳느라고 집안에 흥분이 감돌던 그날을 기억할 정도로 이미 자랐다.

누나들과 형은 갓 태어난 동생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는데 나는 누나들의 차지가 되지 않았다. 막둥이는 늘 엄마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버지는 막둥이를 볼 때마다 아들이 하나 더 생겨서 든든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집안의 사업이 날로 번창하면서 아버지는 고향의 피붙이들을 동두천으로 데려다 안돈시켰다. 집안은 언제나 친척들, 일하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워낙 큰살림이다 보니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어머니는 살림에서 손을 놓고 오로지 우리 5남매만 돌봤다. 그 덕분에 나는 일곱 살 때까지 엄마 젖을 먹으면서 품에서 벗어나지 않는 아기 노릇을 톡톡히 했다.

당시는 자동차보험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던 시절이라 운수업은 큰 사고가 한 번 나면 털어먹기 일쑤였다. 아버지 역시 그런 일을 몇 번 당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났다. 나도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아무튼 내 어린 시절 돈 걱정은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열세 살이 되던 1976년 아버지는 동두천중학교 근처에 2층짜리 30평 규모의 상가주택을 마련했다. 이때부터 사업은 안정화됐고 제일연탄이라는 공장을 직접 운영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동두천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학교생활을 잘하는 모범 어린이였다. 내가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영특했던 데다 위로 누나들과 형이 있어서 또래들보다 뭐든지 빨리 깨우쳤다. 심한 장난이나 말썽을 부리는 법도 없었다. 아버지는 바둑이나 장기를 좋아하셨는데 나도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바둑이나 장기를 두면서 놀았다.

모든 면에서 또래들보다 뛰어났지만 덩치는 조금 작았다. 그게 나 스스로 핸디캡이라고 여겼는지 5학년 때부터 태권도 도장에 나갔다. 형에게 졸랐다. 뭐든지 시작하면 꾸준히 하는 나는 검은띠까지 땄다. 나는 국기원 공인 유단자다. 이 무렵부터는 집안의 귀여운 막둥이 노릇에서 벗어났다. 어머님이 새 바지를 사 와서 단을 올려 주셨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모양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라도 고쳐 달라며 성화를 부렸다. 바지 줄도 칼같이 서 있어야 만족을 했다. 소풍 때 큰누나가 따라오겠다고 해서 나 혼자 간다고 난리를 피운 적도 있다. 친구들도 다 혼자 가는데 나만 누나가 따라오면 내 꼴이 뭐가 되는가.

나는 동두천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전교생 대표로 상을 받았고, 우수한 성적으로 동두천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시절 윤경배·전해용·이의환 등과 잘 어울렸는데 공교롭게도 이 친구들의 장래 희망이 다 성직자였다. 이의환·전해용은 신부님, 윤경배는 목사님이 되고 싶어 했다.

나도 장래 희망을 성직자로 생각해서 이런 친구들과 잘 지냈던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은 성직자가 되기에는 글쎄, 너무 순했다. 언젠가 덩치 있는 친구가 이의환을 괴롭혔다. 나는 태권도에서 배운 뒤돌려차기로 한방 먹였다. 나는 모범생이기는 했지만 죽어지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서 저축을 하라고 하면 은행에 가서 통장을 만들고, 용돈이 생기면 꼬박꼬박 모았다. 이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청소년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융통성이 없다고 놀리기도 했다. 좌우간 나는 바른 길을 가고자 했다. 애국하는 길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 것은 훨씬 뒤였지만.

나는 사춘기 시절에도 반항과 거리가 멀었다. 우리 집안은 화목했다. 아빠랑 엄마는 잉꼬부부처럼 잘 지내셨다. 아버지 사업이 번창해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는 술을 하지 않았고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딸들과 텔레비전을 봤다. 그리고 아들들과 장기나 바둑을 두는 게 아버지 취미생활의 전부였다.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들 돌보는 것 말고는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사춘기가 되면 호기심에서라도 친구들과 동두천 유흥가를 기웃거려 볼 법한데 친구들이 성직자를 꿈꾼 데다, 집안 분위기도 그런 쪽과는 완전히 차단돼 있었다. 동두천에서 사업을 해도 경상도 사람으로 보수적이었던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서는 흔한 미제 물건도 들이지 않았고 커피나 햄버거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가족 외식이나 나들이도 동두천 시내는 피했다. 1968년에 마련한 자가용으로 산정호수나 소요산으로 가족을 데리고 나가서 기분전환을 시켜 주는 것을 좋아하셨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경기북부지역은 평준화지역이 아니어서 소위 말하는 명문고가 있었다. 경기북부 일대는 의정부고등학교와 의정부여자고등학교가 명문이었는데 나도 의정부고등학교를 목표로 삼았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도 성적이 우수했다. 나는 부모님에게 공부를 하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을 정도로 알아서 잘했다. 부모님은 장남인 형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계셨다. 장남이 잘하면 막내아들도 따라서 잘할 것이라고 여기셨나 보다. 장남에게는 굉장히 엄하게 대했지만 막내인 내게는 이런저런 말씀이 없으셨다.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네 살 위였던 형은 의정부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 행정학과에 진학했는데 나 역시 형처럼 당연히 의정부고등학교에 가는 것으로 여겼고 명문대를 목표로 공부했다.

1980년 나는 의정부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이제 명문대 진학이 나에게 주어진 과제가 됐다. 이 대목에서는 나도 중압감을 약간 느꼈다. 그런데 그것을 풀어 나가는 방법이 내가 생각해도 참 건전했다.

나는 남양주시 봉선사라는 절에 다니면서 또래 고등학생들과 불교학생회를 만들고 불교 경전 공부를 했다. 나는 일일이 손으로 쓴 불교학생회보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돌리고 금강경이든 법구경이든 경전 공부를 꽤 열심히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수계를 받고 불제자가 됐다. 내 수계명은 법조(法照)다.

대학 3학년 때 고등학교 친구 상필에게 편지를 썼다.

“이제까지 내가 받은 교육은 뚜렷한 가치관을 심어 주지 않았고 대학만 강조했다.”

대학을 왜 가야 하는지, 대학을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까까머리 고등학생 때 누구나 함직한 이런 흔한 고민조차 접어 두고 나는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했다.

내 고등학교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했다. 공부 잘하는 고등학생들이 그렇듯이 나도 서울대를 목표로 삼았는데 학력고사에서 예상했던 것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실망했다. 나는 재수를 할까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반대를 하셨다. 형이 연세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고 바로 위의 누나도 대학생이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막둥이가 한양대 경영학과에 갔으면 됐지’라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수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1983년 대학생이 된 나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제2의 인생을 살듯이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살게 됐다. 그런데 나의 이런 변화를 부모님께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셨다. 오히려 누나들이 내가 대학생이 되자 모든 게 바뀌었다고 기억한다. 바지 줄이 제대로 안 서 있다고 안 입겠다며 성화를 부리던 막둥이였는데 대학 가더니 아무거나 입더라는 것이었다. 운동권이 돼서 네 것 내 것 없는 시절을 보냈는데 바지 줄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내 성화의 대상은 바지 줄에서 운동으로 바뀌었다. 나는 허투루 일하는 동료들을 보면 참지를 못했다.

1986년 3월 형사들이 집으로 찾아올 때까지 우리 부모님께서는 애지중지 귀애하는 막둥이가 운동권 학생인 줄 전혀 모르셨다. 부모님께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시고 아들을 잡으러 집에 온 형사들에게 밥까지 차려내셨다. 부모님께서 “애를 데리고 가더라도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말하시는 모습을 나는 애써 외면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지역에서 특별히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공화당을 지지했다. 아버지 고향이 경북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에 찬동하셨을 것이다. 그것은 80년대로도 이어졌고 아버지는 언제나 여당 편이었다.

형이 대학생일 때 아버지는 장남이 행여 운동권에 물이 들까 조심해서 지켜보고 엄하게 단속을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막둥이에게는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 당신 생각으로는 큰아들이 그 시기를 무사히 넘겼으니 막내도 그렇게 될 줄로만 여기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의 옥살이에 속 끓일 겨를도 없이 그해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까지 받으셨지만 12월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감옥에서 나온 나는 병상에 누운 아버님께 죄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버님께서 55세로 일찍 돌아가시자 형이 집안의 가장이 돼 홀로 되신 어머님을 모셨고 막내인 나는 집으로부터는 완전히 독립된 생활을 하게 됐다. ‘현장 이전’으로 공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박봉이지만 술이나 잡기를 좋아하지 않아 특별히 쓸 데가 없어 어려움은 없었다. 가끔 어머님께서 막둥이 용돈을 챙겨 주시기는 했지만 나는 이때부터 경제적으로도 자립했다. 여기까지가 내 어린 시절이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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