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법률원과 <매일노동뉴스> 주최로 12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통상임금 토론회에서 박종희 고려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가 발언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지난해 12월18일 나온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통상임금 판결에 난데없이 ‘신의성실의 원칙’이 등장한 배경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사법부가 기업과 노조의 장시간 근로 담합구조를 용인한 상태에서 신의칙이라는 무리수를 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장시간 근로 관행에 면죄부를 준 꼴이라는 지적이다.

<매일노동뉴스>와 노동법률원 공동주최로 12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과 통상임금 토론회’에서 도재형 이화여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통상임금의 일차적 기능은 시간외근로에 대한 가산임금을 계산하는 기초수단이라는 점이고, 이렇게 시간외근로에 대해 가산임금을 지급하도록 한 것은 이를 통해 장시간 근로를 막고 근로자의 생활보장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런데 2012년 대법원의 금아리무진 판결 이후 언론과 학계가 통상임금의 기능적 성격보다는 임금으로서의 성격을 부각했고, 통상임금 법리논쟁이 장시간 근로 문제에서 임금문제로 바뀌어 버렸다”고 진단했다.

실제 대법원의 금아리무진 판결이 나온 뒤 통상임금에 관한 가장 주요한 관심사는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 여부였다. 재계에 이어 학계도 기업들이 천문학적인 추가금액을 부담해야 한다는 데이터를 쏟아냈고, 언론도 주요 기업들이 추가로 부담하게 될 금액을 추산해 보도경쟁을 벌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도 교수는 “기존 판례와 전원합의체 판결의 가장 큰 차이점은 기존 판례가 통상임금을 가산임금의 산정 기초로 접근한 데 반해 전원합의체 판결은 임금의 문제로 접근했다는 점”이라며 “전자의 입장에서는 통상임금의 범위가 확대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후자의 입장에서는 통상임금의 범위 확대가 계약 당사자 사이의 신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고 설명했다.

장시간 근로 문제로 접근할 때 통상임금 범위 확대는 근로시간단축이라는 순기능을 기대하게 하지만, 임금 문제로 접근할 때 통상임금 범위 확대는 노동법에 의한 ‘기대 밖의 이득’이라는 역기능을 나타낼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도 교수는 “민사법적 사고에 익숙한 법관들은 단지 법률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근로자가 계약 외의 이득을 얻고 기업이 예측하지 못한 손실을 입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낄 만하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통상임금 판결에 신의칙이 끼어든 이유다.

장시간 근로 담합구조 묵인한 사법부

이 같은 신의칙 적용은 장시간 근로에 관한 노사 담합구조를 사법적으로 묵인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장시간 근로 관행은 기업이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수준에서 장시간 근로를 유인하기 위해 초과근로를 이용하고, 근로자는 상대적으로 낮은 기대임금을 보전하기 위해 과잉근로를 감내하는 관계에 의해 고착화됐다. 30인 이상 사업체의 경우 월 통상임금 대비 초과근로수당 비중이 30.1%이고, 제조업의 경우 그 비율이 41%나 되는 실정이다.

특히 노조가 있는 사업체의 평일 연장근로시간과 휴일근로시간이 무노조 사업체보다 길다. 노조가 근로시간단축보다는 초과근로시간을 늘려 수당을 많이 받기를 원하는 조합원들의 이해관계를 묵인하고 추종한 결과로 풀이된다. 대기업과 정규직노조를 중심으로 한 장시간 근로 담합구조는 ‘일할 기회 부족’과 ‘일하는 사람들 간 격차’라는 노동시장 핵심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도 교수는 “기업과 노조의 담합구조를 법률적으로 용인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장시간 근로 실태를 해결하는 데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기업이 노조와의 단체협약 등 노사합의를 통해 통상임금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법적 신뢰가 노사 담합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근로기준법 규정을 한시적으로 무력화하면서까지 신의칙을 적용함으로써 장시간 근로에 대한 노사의 담합구조를 묵인해 준 것이라는 비판이다.

'재직자 요건'은 통상임금 줄이는 도깨비방망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새로 도입된 고정성 징표 중 ‘재직자 요건’이 복리후생적 임금항목의 통상임금 인정 폭을 축소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전원합의체 판결에 따르면 재직자에게만 지급되는 임금항목은 통상임금에서 배제된다. 어떤 임금항목이 특정 시점의 재직자에게만 지급될 경우 그러한 임금은 통상임금이 아니라는 뜻이다.

도 교수는 “재직자 요건이 있는 수당을 통상임금 범위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법원이 특정 임금항목의 통상임금 산입 여부에 대한 노사 당사자의 예측 가능성을 높였을지는 몰라도, 그와 함께 특정 임금항목을 통상임금에서 배제할 수 있는 사용자쪽의 수단 역시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우려했다. 어떻게 하면 통상임금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지 손쉬운 방법을 이번 판결이 알려 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기상여금은 어떨까.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내놓은 ‘통상임금 노사지도 지침’에서 정기상여금에 재직자 요건이 있는 경우 통상임금에서 배제된다고 안내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학계의 견해는 적극설과 소극설로 나뉘어 있다. 적극설은 임금항목의 성격을 불문하고 재직자 요건이 통상임금 포함 여부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입장이다. 반면 소극설은 대법원이 재직자 요건을 내세워 통상임금에서 배제한 임금항목이 △특별한 목적의 필요에 대응하는 복리후생 성격이 높은 수당 △기업 외적 사정에 의해 그 임금의 사용 또는 지급이 필요한 수당이라는 점에 비춰 볼 때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성을 부인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재직자 요건을 추가하는 것은 탈법행위이자 무효라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김홍영 성균관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재직자 요건이 있으면 통상임금에서 제외된다고 설명했으므로 정기상여금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주장이 있고, 노동부 지침도 이 같은 입장”이라며 “다만 기업이 그러한 추가조건을 각종 수당과 정기상여금에 무한정 확대해 적용한 결과 기본급이 아닌 모든 임금이 통상임금에서 제외될 수 있다면, 이는 전원합의체 판결이 의도하지 않은 불합리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어 “정기상여금에 재직자 기준을 추가조건으로 정하는 것은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된다”며 “정기상여금은 일정한 대상기간에 제공되는 근로에 대응해 1개월을 초과하는 일정기간마다 지급되는 상여금인데, 단지 퇴직했다는 이유로 그 대상기간분의 전체를 지급하지 않는 것은 유노동 유임금,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토론회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통상임금 판결의 해석을 둘러싼 혼선을 최소화하고, 노동계의 대응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취지로 마련됐다. 김기덕 변호사(노동법률원·법률사무소 새날)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노동자들이 보장받을 수 있는 임금과 근로시간에 관한 권리가 달라진다”며 “판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통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확보하는 방안을 함께 찾아가자”고 말했다.

박성국 매일노동뉴스 대표는 “외환위기 등을 거치면서 노동계의 관심이 고용안정에 집중된 반면 임금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는데, 이번 판결로 임금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다”며 “이를 계기로 근로시간단축 등 본질적인 논의가 확산되길 기대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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