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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제 김헌정 31] 마침내 올린 전국민주연합노조의 깃발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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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전국민주연합노조의 별

전국으로! 전국으로!·‘백약이 무효’라던 옥천, 승리하다·강원도의 힘·“김 부위원장, 장(腸)에 뭔가 잡히는 게 있네”·흔들리는 민주노총·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부터 멀어지다·마침내 올린 전국민주연합노조의 깃발·달밤 블루스·“여기는 1호차, 2호차 나와라, 오버~”·이랜드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현장을 지키는 노동자 국회의원·우리의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LANDS, UNITE!)”·귀여운 막둥이가 노동운동가로·너무나 갑작스러운, 너무나 애통한 죽음·남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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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민주노총

경기도노조는 탄력을 받고 있었다. 부산으로, 충북으로, 강원으로 연대의 틀을 넓혀 가며 전국적 전망을 키워 갔다. 하지만 전국단일노조 건설은 2005년 11월 30일 울산에서 열린 전국단일조직추진위원회 2차 대표자 모임에서 제동이 걸렸다.

이날 모임의 회의자료는 김헌정이 만들었다. 제목에 ‘전국 자치단체 관련 전국적 연대와 단일노조 추진 준비 대표자회의’라고 이름을 붙이고 전국단일노조의 명칭으로 ‘전국지방자치단체연합 일반노동조합’과 ‘전국자치단체노동조합’이라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는데 이 대목이 걸림돌이 됐다.

경남일반노조 강동화 위원장과 간부들은 “자치단체노조가 되면 환경미화원이나 상용직이 아닌 조합원들은 어떻게 되느냐”며 의문과 우려를 표시했다. 경남일반노조의 조합원 구성은 자치단체에 직간접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이 60%, 레미콘사업장·유통업과 제조업·금속영세사업장 등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40% 정도였다.

이 문제로 김헌정은 강 위원장과 여러 차례 토론을 한 바 있었다. 강 위원장의 결론은 “경남일반노조 등 일반노조들과 통합하려면 경기도노조가 자치단체 관련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비정규 노동자와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먼저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남일반노조로서는 이 결론을 당연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경기도조노조가 이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경기도노조에는 훈련된 활동가들이 부족했다. 1999년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 결성 이후 경기도노조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싸웠다. 의정부가 수습되자마자 포천으로 달려갔고 포천에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고양으로 뛰었다. 고양에서 투쟁하는 동시에 부천과 성남을 조직했고 곧이어 안산·파주·수원·시흥·용인·안양·평택 등 경기도 전역으로 전선을 넓혔다.

덩치만 키운 것은 아니었다. 조직과 투쟁을 반복하면서 경기도노조는 ‘철의 노동자’와 견줘도 부끄럽지 않을 현장 출신 간부들을 다수 길러냈다. 의정부의 홍희덕·나천봉·진흥화·김윤조, 포천의 전순영, 고양의 김주실, 부천의 송양권·김유진·성남의 백완기·문공달, 수원의 김영철·강병월·이광희, 시흥의 이상관, 안양의 최봉현·김평수, 평택의 배홍국 등이 경기도노조가 자랑하는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이들은 투쟁이든 교섭이든 최고였지만 현장에서 놓여날 틈을 좀처럼 얻지 못했다. 환경미화원이나 자치단체 상용직 노동자들은 금속 같은 제조업 노동자들처럼 공장 울타리 안에서 일하지 않는다. 유통업처럼 매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처럼 사무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전국에 흩어져 있다. 집단교섭에서 알 수 있듯이 분회가 스무 곳이라면 상대해야 할 자치단체도 스무 곳이다. 여기에 청소업체를 더하면 분회보다 사용자가 더 많다. 당연히 각 분회가 처한 상황 역시 천차만별이며 단협안도 수십 개를 준비해야 한다. 이런 와중에 민간위탁이 노조의 존립 자체를 흔들고 있다.

이것은 조합 간부들의 일상적인 동선의 길이가 엄청나게 늘어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임단협 투쟁을 통해 전임자들을 확보했다지만 그 숫자는 노동조합이 수행해야 하는 일상활동의 절대량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경기도노조 조합원들의 평균연령은 매우 높다. 나이가 적은 축들이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이다. 그들은 예외 없이 경기도노조를 통해 노동조합을 알게 됐다. 간부들 역시 그랬다. 경기도노조를 이끄는 김헌정은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둬야 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경기도노조가 설립됐더라도 이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경기도노조가 자랑하는 역전의 용사들도 이 시기에는 다른 직업을 갖고 있었다.

환경미화원들과 상용직 노동자들은 십 년이 지나서야 노동자 대투쟁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민간위탁이라는 비수가 목젖에 닿았는데 전국으로 가는 길은 멀었고, 투쟁하고 교섭하고 조직하고 교육하느라 숨은 턱밑까지 찼는데 일손이 달렸다. 이것이 경기도노조가 안고 있는 객관적인 어려움이었다.

더 안타까웠던 것은 경기도노조가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경기도노조에는 목마를 때 목을 축여 주고 고달플 때 짐을 함께 들어주는 친구가 절실했다. 지역의 노동조합들이 힘을 보탰고 시민단체들이 도와줬지만, 이 싸움은 어디까지나 경기도노조의 전쟁이었다.

세상에 혼자란 없다. 그것을 알기에 김헌정은 노동조합 설립 초창기부터 조합원들에게 지원투쟁과 연대투쟁을 요구했다. 민간위탁을 막고 고용안정을 쟁취하려면 전국의 환경미화원들과 상용직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기도노조 조합원들이 먼저 단결의 힘을 맛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기도노조의 전쟁은 전체 민주노조진영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이 일상적으로 치르는 크고 작은 싸움 가운데 하나였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겠지만 동원할 수 있는 화력과 병력은 한정돼 있다. 모든 싸움에 똑같이 자원을 배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하고 그것이 전략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전략을 수립하고 누가 이 전략 아래 민주노조진영의 역량을 배치할 것인가.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노동자 대투쟁의 세례를 기다리던 십 년 동안 민주노조진영은 대기업·대공장 노동조합 중심으로 질서를 잡기 시작했다. 전노협이 힘을 잃고 민주노총이 합법화되면서 이 질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굳어졌다. 민주화의 진행에 따라 노동조합이 시민권을 얻고 정치적 욕구를 발산할 공간이 열리자 씨앗을 한 알이라도 더 뿌리기보다는 열매를 거두자는 분위기가 확산된다.

뜸이 들기도 전에 솥뚜껑을 열면 어떻게 되나. 너도나도 주걱을 들고 달려든다. 밭을 일굴 때는 드러나지 않던 불신과 대립이 추수를 서두르면서 남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증폭됐다. 인사는 노동자의식과 능력이 우선돼야 함에도 정실로 흘렀고 ‘노동자는 하나’를 실천하는 데 쓰여야 할 예산이 ‘조합원 관리비’로 나가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됐다.

이런 분위기는 내셔널센터인 민주노총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하면 조합의 덩치가 클수록, 상급단체로 올라갈수록 심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인사와 예산, 여기에 더해 정보가 권력이 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확보하지 못하면 교섭이든 투쟁이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도태된다는 피해의식이 급속도로 퍼져 갔다.

이러면서 민주노총은 ‘표 대결’ 없이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게 됐고 언제부턴가 활동가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민주노총 임원선거였다. 그런데 그 ‘표 대결’은 대기업·대공장 노동조합 중심으로 굳어진 질서를 전제로 해서 치러지는 것이었다. 후보들은 국민파니 중앙파니 현장파니 갈려서 노선의 다름을 주장했지만 정작 단위노조의 일상활동을 들춰 보면 이를 입증할 단서는 많지 않았다.

물론 이들이 갈라지게 된 역사적 맥락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맥락만 있는 게 아니다. 이들은 ‘협력의 역사’도 공유하고 있다. 민주노총이라는 질서를 굳히는 데 힘을 모았던 민주노조진영이 질서가 굳어지자마자 서로 다툰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았다.

노선이 달라서 경선을 한다면서 정책 대결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도 이상했다. 실은 민주노총 임원선거는 정책선거가 아니라 조직선거였다. 조직선거란 철저하게 주고받는 선거다. 이렇게 민주노조진영은 제 살을 깎아먹었고 그럴수록 노동자 대투쟁의 기억은 잊혀졌다.

그러는 사이 자본은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갔다. 박정희는 재벌을 만들어 줬으되 꼼짝 못하도록 다스렸으나, 박정희의 정적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재벌을 풀어주고도 고맙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자본은 저항할 태세를 갖추지 못했던 미조직 노동자들을 먹잇감으로 삼아 노동시장을 야금야금 장악해 들어갔다. 그들이 쓴 수법은 전형적인 분할통치였다. 지불능력이 있는 대기업들은 노동조합으로 하여금 경제투쟁에 몰두하게 만들어 노동자들이 공장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는 하청과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쥐어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를 이간질한 것도 그들이었다.

민주노총은 이를 막지 못했다. 한쪽에서는 비정규·불안정 노동이 만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의 직장’이라느니 ‘귀족노조’라는 말이 나오는데 민주노총은 민주노조진영의 질서를 바꾸는 데 실패했다. 이리하여 민주노총의 사회적 권위는 점점 더 떨어졌다.

모든 것은 행동이 말해 준다. 민주노총은 변화된 상황에 맞게 인력과 예산을 배치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으로서는 억울했을지 모른다. 투쟁기금을 염출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비정규·불안정 노동에 화력을 집중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자세로는 자신의 정당성을 방어할 수 없다. 복지예산을 늘리라는 서민들의 요구에 부자로부터 세금을 더 걷을 생각은 하지 않고 전용할 예산이 없다고 답하는 정부의 논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민주노총이 있었지만, 민주노총과 경기도노조의 관계는 경기도노조 본조와 분회의 관계에 비하면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그것이 민주노총의 현실이었고, 경기도노조와 같은 ‘변방의 노동조합들’이 처한 현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돌파해야 했다.

김헌정은 답답했다. 이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헌정으로서는 민주노총 상층부에서 논의되던 ‘산별 전환’ 대안이 탐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도노조더러 제조업이나 유통·서비스업 노동자들을 조직하라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라는 소리였다.

김헌정은 전국단일노조의 깃발 아래 민주노조진영 주류에서 벗어나 있던 활동가들이 힘을 합치면 전문성과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여 자치단체에 직간접으로 고용돼 있는 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헌정은 노동운동의 다양한 분야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으며 잔뼈가 굵은 일반노조의 활동가들이 전국단일조직으로 전진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그가 그리던 비정규·불안정 노동 철폐의 경로이자 민주노총이 사는 길이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부터 멀어지다

김헌정은 학생운동 출신이었다. 현장으로 옮겨 오면서 학생운동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졌지만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의 아우로서 남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는 학생운동에게 기대하는 심정도 없지는 않았다. 경험은 없지만 때 묻지 않은 청년들이 현장으로 들어온다면 노동형제들은 얼마나 기뻐할까.

그러나 학생운동은 자기 몸 추스르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2000년대 초반 학생운동 또한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갔다. 학생운동의 리더들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 학생운동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궁리를 거듭한 끝에 학내 이슈로 눈을 돌리기로 한다. 학생운동에도 변화의 시기가 다가왔다.

문제는 민주화가 되고 난 뒤라 학내 이슈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학도호국단 철폐·교련 반대·사찰 폐지·총장 직선 등 ‘학원 자율화’와 ‘학내 민주화’의 깃발을 들고 학생대중의 정의감에 호소하는 게 가능했지만 이제는 그런 이슈가 거의 없었다. 학생운동의 리더들은 당황했다.

학생운동이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학생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주력군이었다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민주화가 되고 학원에 평화가 돌아오자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시대’와 ‘자유’는 더 이상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스펙 쌓기와 취미활동이 캠퍼스의 일상이 됐고 이 두 영역을 학생운동이 지도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운동의 리더들은 학생운동의 영광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들은 마침내 이슈를 골라냈다. 그것은 ‘등록금 인하’였다. 노동조합이 경제투쟁을 하듯이 학생회가 학생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대중운동을 살리기 위해 학생대중의 경제적 관심사에 운동의 초점을 맞춘다는 이 ‘신전략’은 학생운동의 폭을 넓힌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도 실패했을 뿐 아니라 학생운동 고유의 강점마저 약화시켰다.

학생은 계급이 아니다. 부모의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라 학생 개개인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또 놓치면 안 되는 게 대학은 ‘신분상승의 통로’라는 사실이다. 노동자가 되기 위해 대학문을 두드리는 학생은 없다. 누구나 멋진 직장을 꿈꾼다.

등록금이 너무 비싸 대학 다니기가 힘들다고 하더라도 대학 졸업장이 그 비싼 등록금을 보상해 준다면 대학생들은 참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등록금이 비싼 게 아니라 졸업장의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학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이걸 모를 대학생이 있을까.

그러므로 등록금이 인하된다고 해도 다수의 대학생들은 여전히 졸업장의 가치에 집중할 뿐이다. 설마 학생운동이 ‘대학만 졸업하면 몽땅 공무원으로 취직시켜 달라’라는 이슈를 걸고 싸워 줄 것이라고 믿는 대학생은 없을 것이다.

전후 관계를 따져도 등록금을 부담하는 사람은 부모이지 학생이 아니다. 자신이 해야 할 경제투쟁을 대신해 준다고 자식을 기특하게 여길 부모가 어디에 있나. 그나마 요즘에는 돈 없는 집 자식은 일류대학에 가지도 못한다. 따라서 경제투쟁으로 학생운동을 일으키겠다는 발상은 전제부터 그른 것이었다.

운동의 방식이라는 측면에서도 학생들의 경제투쟁은 성립하기 어렵다. 학생들은 임노동관계에 속박돼 있지 않다. 노동자에게 임금은 생존이 걸린 문제이고 자신의 노동을 착취한 상대가 눈앞에 존재한다. 하지만 학생에게 등록금은 생존이 걸린 문제도 아닐뿐더러 자기가 벌어서 내는 것도 아닌지라 수탈이라고 선동할 수도 없으며, 대체 누가 원흉인지 찾아내서 혼내 주기도 마땅치 않다.

그러니 대체 누구와 싸운단 말인가. 재단을 상대로? 그게 답이 아닌지는 학생들도 안다. 교육부를 상대로? 그것도 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국가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쯤 되면 이미 정치투쟁이다. 게다가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1인 시위? 단식? 농성? 등록금 내려 주지 않는다고 ‘정권 타도’를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에는 등록금 인하를 공약하는 정당에 표를 주자며 투표장으로 몰려가는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대중운동이 아니다.

학생운동은 자유·민주·정의·민족·양심 등과 같은 추상적인 열정에서 출발한다. 학생들은 책으로 세상을 읽는다. 그리고 그 세상이 책에 쓰인 것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저항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운동은 태생적으로 이념투쟁과 정치투쟁에 주력해야 하는 운명이다. 독재정권이 물러가면 학생운동이 동력을 잃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등록금 인하는 학생운동이 제기할 수 있는 수많은 이슈 가운데 하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학생운동의 리더들은 이 이슈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2000년대 중반이 지나자 학생운동의 대표 슬로건은 등록금 인하가 됐다. 그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 슬로건이 그들로 하여금 학생운동의 전통적인 이념지향성까지 포기하게 만들 것이라고는.

김헌정은 대학 때 ‘비공개 학습모임’을 하면서 독서의 기초를 닦았다. 그것이 그가 노동해방과 민족통일을 향한 한길로 매진할 수 있었던 자양분이 됐다. 그런데 김헌정이 대학문을 나선 지 20년 뒤 학생운동에는 학습이 사라졌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사라진 자리에 안철수와 박경철이 등장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성을 멀리하고 이념을 부정한 대가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북한 봉쇄, 서브프라임모기지 파산, 유럽발 금융위기, 한미FTA, 신자유주의, 비정규·불안정 노동, 양극화……. 일련의 사태가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를 웅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모순이 가장 응축된 남한의 대학에서 ‘청춘콘서트’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학생운동 리더들은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또한 진보의 일환이라고 두둔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학생운동의 리더들은 이슈의 전환으로 새로운 동력을 얻기를 꾀했지만 학생대중을 사로잡지도 못했고 학내에 버티고 있던 급진적 학생들까지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네오콘의 아이콘인 콘돌리자 라이스가 와도 대학생들은 화염병 하나 던질 줄 몰랐다. 대한민국은 미국 대통령이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성역이던 대학에 나타나 편안하게 강연을 하는 나라가 됐다. 김헌정이 대학에 다니던 시절이었다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과거에는 ‘직업적으로’ 학생운동을 해도 ‘5학년’이나 ‘6학년’이 고작이었지만 이제는 10년 넘게 대학 주변에서 학생운동에 매달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누가 말하듯 건강한 민주시민으로 대학생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등록금 인하 투쟁을 하는 것이라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반값 등록금’은 사회 전체에 구조화된 양극화를 반영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학생운동이 그 수명을 다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어떤 운동이든 소수가 되기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소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때로는 지키는 게 운동인 때도 있다. 역사책에 기록된 것으로 학생운동은 만족해야 했다. 그래야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길 수 있다. 학생운동의 리더들이 이념의 씨앗을 간직하려 하지 않고 섣부른 경제투쟁에 나서면서 대학은 자유주의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김헌정이 대학생 때 주저 없이 따랐던 ‘공장으로!’라는 슬로건은 캠퍼스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학생운동의 리더들이 진로를 결정함에 있어 노동운동은 더 이상 옵션이 아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이어 주던 통로가 막히자 경기도노조처럼 무조건적인 헌신을 요구하면서도 광채는 나지 않는 외곽의 노동조합들은 머리를 빌려 올 데가 없었다.

마침내 올린 전국민주연합노조의 깃발

내가 경남일반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는 ‘자치단체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이 전국단일노조의 주력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명칭도 그렇게 붙인 것이었다. 나는 어떤 일을 추진함에 있어 남을 끌어들이기 위해 내 속셈을 숨기는 따위의 짓을 경멸한다.

내가 설계한 전국단일노조는 ‘자치단체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을 전국적으로 조직해 교섭력을 확보하고, 여기에서 얻어진 힘을 바탕으로 기존의 노동조합들이 손을 놓고 있던 비정규 노동자와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자치단체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이 주력이 돼야 하는가. 그들이 다수였기 때문이다. 경기도노조는 말할 것도 없고 경남일반노조도 그랬다. 그러나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고집을 부린 것은 아니었다.

영세사업장을 근거로 하는 노동조합을 지역과 업종을 뛰어넘어 종횡으로 묶는다는 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방향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도 순서가 있다. 무조건 다 모은다고 능사가 아니다. 힘을 최대한 발휘하려면 전략을 잘 짜야 한다.

경기도노조는 3년째 자치단체들과 집단교섭을 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보자면 그런 지역도 있고 그렇지 못한 지역도 있다. 따라서 이 경험들을 한데 모으면 전국 단위의 집단교섭을 정착시킬 수 있다. 이를 통해 전국의 “자치단체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을 단일한 대오로 뭉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과정을 보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까지 전국단일조직이 자신의 힘을 여기에 집중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집중이 나머지 업종의 조합원들을 소외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 역시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신뢰로 풀어야 할 성질의 것이지 사전협상을 해서 조직통합의 조건을 마련한다고 풀릴 게 아니다.

나는 경남일반노조를 계속 접촉했다. 전국단일노조가 힘을 발휘하려면 단순히 조합원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에 만족해서는 곤란했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대부분이 하청업체인 영세사업장들은 지불능력이 없다.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자신을 지키려면 업종별·지역별로 집단교섭을 성사시켜 최종적으로는 대기업과 정부를 끌어내야 한다.

나는 “자치단체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이 전국 단위의 집단교섭을 정착시키는 것에서 그 전망을 찾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현안이고 우리가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으로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어진 전국단일노조추진위원회 모임에서는 강동화 위원장의 제안대로 통합노조의 명칭을 전국민주연합노조로 결정했다. 하지만 경남일반노조 조합원들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경남일반노조는 불참을 선언했다. 2006년 1월 경남일반노조는 진주일반노조와 통합해 명칭을 ‘일반노조’로 정하고 자신의 길을 갔다.

내 실망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나는 2004년부터 경기도노조의 내부 활동보다는 전국적 전망을 찾는 데 주력했다. 두 해 동안 전국단일조직 건설을 가시화한 것만 해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경남일반노조를 설득하지 못한 게 뼈아팠다.

웬만한 일로는 내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나도 이 일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기운 내라고 말을 건넬 정도였다. 기울어졌던 고개를 다시 꼿꼿이 폈다. 나는 경남일반노조는 일단 잊고 통합 가능한 노조들부터 절차를 밟기로 마음을 먹었다. 전국단일노조추진위원회에서도 그렇게 의견을 모았다.

전국일반노조 대표자회의의 권고에 따라 경기도노조와 경기지역일반노조가 먼저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나머지 노조들은 경기도노조가 전국민주연합노조로 명칭과 조합원 자격 등 규약을 변경한 뒤에 가입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경기지역일반노조는 2006년 1월 1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경기지역일반노조를 경기도노조 일반사업본부로 전환한다’는 안건을 재적 대의원 21명 중 21명이 참석해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2002년 설립된 경기지역일반노조는 부천시흥지부·성남광주지부·수원오산화성지부·용인지부·하남지부 등 5개 지부에 동방렌탈분회·일새마을금고분회·등용문학원분회·하남시청비정규직분회 등 13개 분회를 꾸리고 있었다. 경기지역일반노조의 조합원은 240여명이고 4개 분회는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경기지역일반노조 이선규 위원장은 경기도노조 부위원장, 각 지부장들은 조직부장, 이종란 노무사는 법규부장으로 합류했다.

경기지역일반노조와의 통합에 대해 경기도노조 간부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홍희덕 위원장님은 내부 논의 때 반대의견을 내셨다. 경기지역일반노조의 활동가들 대부분이 ‘경기동부’라 불리는 정파 소속이어서 조직적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경기동부는 1991년 창립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에 뿌리를 둔 정파로서 성남을 중심으로 한 경기동부지역을 동심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도 전국단일노조로 가는 길을 늦출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나는 만에 하나 갈등으로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전국단일조직에 피해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간부들은 내 판단을 믿어 줬다.

경기도노조와 경기지역일반노조는 통합 이후 임원선거를 통해 홍희덕 위원장, 강병월·김덕영·김영철·김헌정·이상관·이선규·이준휘 부위원장, 문공달 사무처장을 선출했다. 이어 2월 28일 대의원대회를 열고 명칭 변경, 조직대상 및 사업형태 등에 관한 규약을 변경했다. 찬성 64표에 반대 9표로 명칭 변경·규약 개정 승인 안건은 통과됐다.

경기도노조가 민주연합노조로 바뀌었고 조직 대상은 ‘경기도 지역의 모든 노동자’에서 ‘취업 중인 자, 일시적 실업자 및 일용노동자’로 확대돼 전국의 노동자는 누구나 가입할 수 있게 됐다. 광역시·도단위에는 지역본부, 사업장 단위나 기초자치단체 행정구역별로는 지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마침내 전국단일조직인 전국민주연합노조의 깃발을 올린 것이다. 명칭 및 규약 변경 이후 전국단일노조 건설에 동의했던 노조들이 절차를 거쳐 속속 가입했다.

옥천지역환경관리노조(3월 15일)·제천상용직노조(3월 17일)·고령지역환경관리노조(3월 17일)·대구지역환경관리노조가 조직변경을 했고, 부산일반노조 청소업체 일부 조합원들도 가입했다. 3월에 신규 조직된 속초 환경미화원들은 속초지부 소속 조합원이 됐다.

2003년 설립된 충북일반노조는 당시 삼성택배 하청업체인 청도물류의 노동자들을 조직해서 분회를 결성했지만 투쟁 과정에서 조직이 와해돼 명맥만 유지하는 상황이어서 이성일 위원장이 단신으로 경기도노조로 왔다. 이로써 전국민주연합노조는 부산·대구·경북·충북·강원·경기 등 6개 광역시·도에 본부나 지부를 둔 전국노조로서 체계를 갖추게 됐다. 당초 구상했던 것에 비해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지만 전국단일조직 건설에 앞장섰던 나는 한숨을 돌렸다.

나는 전국의 현장을 누빌 활동가들을 얻게 됐다는 게 특히 기뻤다. 외부로부터 수혈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비슷한 조건에서 활동하며 경험을 쌓은 노동조합 간부들이 대거 합류함으로써 우리는 만성적인 일손 부족을 해소할 실마리를 찾았다. 민간위탁 저지투쟁도 새로운 단계를 맞이할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민주연합노조는 전국단일조직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에서 경기도노조로, 경기도노조에서 전국민주연합노조로 오는 데 7년이 걸렸다. 2006년 6월 전국민주연합노조는 전국조직의 위상에 걸맞게 노조 사무실을 경기도 고양시에서 민주노총이 있던 서울 영등포 소재 대영빌딩으로 옮겼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박미경 작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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