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 유출 사태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유사한 사건이 또 발생했다. 이번 사건의 주인공은 공무원이다. 나랏돈이 새는 것을 막아야 할 공무원이 개인정보를 유용해 수십억의 국민 혈세를 호주머니에 챙겼다.

고용노동부 5급 공무원인 최아무개(58)씨의 행각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 웬만한 보이스피싱 사기단은 따라올 수 없는 지능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5일 경찰에 따르면 최씨는 노동부에서 관리하는 고용보험정보시스템에서 개인·기업 정보 800만건을 조회한 뒤 이 가운데 12만건을 불법으로 유출했다. 지난 2008년 8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무려 5년 동안 정보를 빼돌렸음에도 노동부에선 아무도 몰랐다. 노동부 직원들이 고용정보시스템의 정보 조회를 요청할 경우 최씨는 열람 권한을 부여하는 정보책임자였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최씨는 친인척을 내세워 비영리법인을 세우거나, 지인들이 운영하는 노무법인을 활용했다. 이들에게 빼낸 정보를 넘겨 기업에게 접근했고, 고용보험지원금 신청과 관련된 위임장을 받아냈다. 중소영세기업은 고용보험지원금의 신청과 절차를 모르거나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악용했다. 이들에게 지원금 신청을 맡긴 기업만 무려 4천800곳에 달한다. 최씨 등은 기업을 대신해 신청한 뒤 지원금(190억원) 중 30%를 기부금 또는 수수료로 받아 챙겼다. 최씨 등이 받아 챙긴 눈먼 정부지원금만 58억원에 달한다.

이번 사건으로 민간기업에 이어 공직사회마저 개인정보의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 확인됐다. 최씨와 같은 사례는 이미 예고됐는지 모른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의심 아들 개인정보 유출사건만 봐도 그렇다.

청와대 행정관이 서울 서초구청 고위관계자에 요청해 채군의 개인정보를 불법으로 빼내는가 하면 국정원 정보관은 학생생활기록부를 유출했다. 검찰은 이들에게 정보 유출을 지시한 윗선을 밝히는 수사를 하고 있지만 지지부진한 상태다. 채 전 총장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수사하던 중 박근혜 정부의 찍어내기로 중도 낙마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물론 정부는 채 전 총장의 뒷조사에 대해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청와대 행정관과 국정원 정보관의 개인정보 빼내기를 개인 일탈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청와대·국정원 등 권력기관이 요청하면 언제든지 개인정보를 손쉽게 내주는 나라다. 정부부터 개인정보 보호에 매우 둔감하다. 엄격하게 개인정보를 관리하고, 보호하기는커녕 떳떳하게 빼돌린다. 이를 악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채 전 총장 사건을 보면 공직기강의 둑은 이미 무너졌다고 봐야 한다. 고위 공무원들이 이럴 정도인데 하물며 5급 공무원인 최모씨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노동부가 뒤늦게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방하남 장관은 5일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노동부 내 정보관리 현황에 대한 실태 점검과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대책을 지시했다. 방 장관이 나설 정도이니 이 사건의 파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카드사의 개인정보 대량 유출 사태가 터진 지 한 달이 채 안됐고, 그 후폭풍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동부의 행보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개인정보관리시스템을 손질하면 이런 사건이 재발되지 않을까. 그렇게 믿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은 정부의 허술한 개인정보 관리체제에서 빚어진 문제지만 공무원들의 낮은 정보인권 의식과 오·남용이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 카드사들의 개인정보 유출은 규모로 볼 때 세계 3위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그 심각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카드사에 이어 정부마저 개인정보 보호의 구멍이 난 것이 확인된 만큼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너무나 쉽게 유출되고 악용되고 있는 주민등록번호제도를 개선 또는 폐지하자는 제안이 그 일환이다. 범정부 차원의 개인정보 관리기구를 발족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금융기관 간에 허물어진 정보 칸막이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금융계열사 간 개인정보 공유와 유통을 막는 것이다. 개인정보 보호에 안일한 정부 부처 수장부터 책임지고 물러나야 공직기강이 바로 설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카드사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여야가 국정조사를 벌일 예정이다. 공무원 정보유출 사건으로 정부·공공기관의 개인정보관리시스템도 실태 파악과 점검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필요하다면 정부의 개인정보관리시스템에 대한 전수조사라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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