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나온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신의칙(信義則)’이란 말이 관심을 끈다. 판결은 정기상여금처럼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되는 임금을 근로기준법에서 말하는 통상임금이라고 확인했다. 또한 임금교섭에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계산하지 않기로 노사가 합의했더라도 이 합의는 근로기준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했다. 따라서 법률상 통상임금에 해당하는 정기상여금 등 관련 임금을 통상임금 산정에 포함시켜 초과근로수당을 다시 계산한 다음, 이미 지급받은 것과 비교해 차액이 발생하면 그 차액(사용자가 착복한 임금)을 추가임금으로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판결에서 추가임금 청구를 가로막는 도깨비방망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신의칙’이다. 신의칙 요건을 갖춘 경우에는 자본가가 떼먹은 임금을 노동자가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인데, 판결은 신의칙 적용요건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고 산정한 항목이 정기상여금일 것, 둘째 노사가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신뢰한 상태에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는 합의를 하고 이를 토대로 임금 조건을 정했을 것, 셋째 노동자가 추가임금을 청구할 경우 예측하지 못한 재정 부담으로 기업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그 존립이 위태롭게 될 수 있다는 사정이 있을 것. 이에 해당하면 사용자가 떼먹은 임금을 노동자에게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법리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그 본질에서부터 노동자의 몫이었던 임금 일부를 자본가가 수십 년 동안 부당하게 가로채 왔다. 여기에는 1988년 만들어진 '통상임금 산정지침'이라는 이름을 단 고용노동부 예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국가와 자본이 합작해 노동자들을 상대로 임금 착복 사기극을 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부조리를 대법원이 바로잡기는커녕 ‘신의’라는 말을 내세워 임금 착복의 사기극을 묵인할 수도 있다고 결정한 것이다. 이에 발맞춰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해 떼먹은 임금을 노동자들에게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신의칙은 쉽게 말해 뒤통수를 치지 말라는 것인데, 그 신의칙을 내세우면서 노동자들의 뒤통수를 치는 데 정부가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부가 법체계 밖으로 내친 전국교직원노조(전교조)와 설립을 불허한 전국공무원노조(전공노)와의 형평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부는 이달 23일 펴낸 '통상임금 노사지도 지침'에서 신의칙에 대해 “법률관계 당사자는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해야 하고,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 또는 방법으로 권리행사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근대 사법의 대원칙으로서 모든 법 영역에 적용될 여지가 있는 추상적인 일반규범”이라고 설명했다.

신의칙을 전교조와 전공노에 적용한다면, 대한민국 정부는 '법률관계 당사자'인 전교조와 전공노의 이익을 배려해야 하고, 형평에 어긋나고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과 방법으로 두 노조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전교조나 전공노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법률 어디에도 명시되지 않은 권리인 인사경영권을 들먹이며 공기업의 단체협약을 개악하려는 정부 정책을 보더라도 신의칙의 공평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분할 민영화에 맞서 파업을 하다 불법으로 낙인찍힌 철도노조의 사례는 두말할 나위 없다.

신의칙은 “상대방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정직하고 공정하게 대우하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법을 만드는 입법부, 법을 해석하는 사법부,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가 노동자를 정직하고 공정하게 대우한 적이 별로 없다. 헌법에서 보장한 노동자의 권리는 일상적으로 무시되고 위협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가 노동자들로부터 착복한 임금을 되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 ‘신의칙’이라는 말로 포장돼 퍼지고 있다. 노동자 임금을 착복한 자본가의 이익을 배려하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자본의 이익이 아닌 노동의 권리를 위한 신의칙 적용에 국가는 소극적이다.

정부와 자본은 입만 열면 법치, 즉 법의 지배(the rule of law)를 내세운다. 민주주의 기초의 하나로 거론되는 법치의 전제는 법 앞의 평등이다. 법 앞의 평등이 무너질 때 법치는 법을 이용한 지배(the rule by law), 즉 독재로 전락한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독재로 전락한 지 오래인지도 모른다. 노사관계에서 한쪽만을 위해 존재하는 신의칙 타령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