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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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전국단일조직을 향해

경기도 최초의 상용직 집단교섭·정치판을 빗자루로 쓸어버려라!·교육! 교육! 그리고 또 교육!·경기도노조의 새로운 장수들·김헌정, 또 구속되다·“여보, 나는 당신이 필요해!”·하루도 쉬지 않는 경기도노조·내 시선은 전국을 향하고 있다·“우리는 민주노동당”·‘NL’이냐, ‘PD’냐·기다리던 우군, 민주노동당 의원단과 공무원노조·환경미화원은 공무원보다 적게 받으라는 법이 있나?·이상관 분회장의 신조 “내 밥숟가락은 내가 지켜야”·배홍국 해복투위원장의 다짐 “나는 제일 나중에 복직하겠다!”·4년2개월 만에 단협 체결한 성남분회·지부에게 조합비 50%를 달라?·끝까지 괴롭히는 청소업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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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쉬지 않는 경기도노조

김헌정의 구속에도 경기도노조는 의연했다. 전 조합원들이 수원남부경찰서 앞에서 위원장의 구속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고 수원시청 앞에서는 ‘노조탄압 분쇄’와 ‘단체협약 쟁취’ 현수막을 걸고 시위를 했다. 각 분회들은 단협 체결을 위한 천막농성과 집회를 이어 갔다. 상급단체인 공공연맹은 위원장 구속이라는 사태에 직면한 만큼 전 조합원 파업으로 맞불을 놓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으나 경기도노조는 위원장 구속 이전에 진행하던 투쟁일정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구속영장이 기각돼 석방된 이미숙 국장은 수원분회만 파업에 들어가고 다른 분회는 총회시간을 이용한 순환파업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위원장의 구속기간이 길지 않을 것이라고 이 국장은 예상했다. 일부 간부들은 투쟁이 과도하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면적인 파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 국장의 판단이었다.

홍희덕 사무처장은 위원장 구속으로 벌어진 위기상황에 차분하게 대응했다. 그는 과도한 투쟁을 문제 삼는 간부들의 지적을 귀담아들으면서 노조를 추슬렀다. 김헌정이 예상했던 대로 오십대 이상의 의리파 간부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위원장의 유고를 빌미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일부 간부들을 설득했다.

시흥의 이상관 분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간부들이 모여서 위원장 면회를 갔다가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그 자리에서 몇몇 간부들이 위원장 성토를 하는 거야. 나는 위원장이 싫은 이유를 대 봐라 그랬지. 아무도 말을 못해. 김헌정 위원장 머리가 없으면 우리 노조는 무너져. 반란은 그렇게 끝난 거지 뭐.”

다행히 김헌정은 7월 14일 보석으로 석방됐다. 그의 구속기간은 43일로 그쳤고 이후 재판에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김헌정은 언제 구속이 됐냐는 듯이 며칠 뒤 업무에 복귀했다.

노조는 위원장 석방 이후 상임집행위원 간부수련회를 열어 심기일전하는 계기를 마련한 뒤 7월 31일부터 2003년 경기도 내 상용직 임금인상 집단교섭에 들어갔다. 수원·고양·안양·파주·의왕·화성·용인·오산·과천·광명·포천·군포까지 12개 자치단체가 집단교섭에 들어왔다.

임금인상을 놓고 벌이는 자치단체들과의 집단교섭은 비교적 수월하게 이뤄지는 데 비해 각 분회별 단체협약 체결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나 수원이 6월 18일 단협을 체결했고 그 이전에 오산에서도 타결을 했기에 경기남부권 분회들은 인내심을 갖고 교섭과 투쟁을 진행했다.

포천·고양 등 단협을 갱신하는 분회들도 싸워 본 경험이 있기에 조급하게 굴지 않고 각 자치단체들과 서서히 접점을 좁혀 나갔다. 당시 경기도노조 조합원들은 “질긴 놈이 이긴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평택은 여전히 어려웠다. 2003년 5월 26일 경기지방노동위원회는 평택시가 상용직들을 부당하게 해고했다고 판정했다. 하지만 평택시는 대법원까지 해고무효 소송을 끌고 가겠다고 밝혔다. 또 평택시는 6월 30일자로 청소업무까지 민간위탁시켜 환경미화원 35명을 해고했다. 평택시청 소속 환경미화원은 75여명이었는데, 해고된 35명이 모두 경기도노조 조합원이었다. 40명은 한국노총 연합노련을 상급단체로 하는 기업별 노조 조합원이었다.

민간위탁으로 평택분회에서 수십 명의 해고자가 나오자 노조는 평택 집중지원투쟁을 벌이는 한편 해고 조합원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 민간위탁을 반대하면서 업체로 가지 않은 조합원들에게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도록 했다. 이를 노조에서는 ‘생계투쟁’이라고 불렀다. 복직투쟁을 이어 갈 조합원들에게는 생계비로 월 100만원씩을 지원했다.

조합원들 가운데 6개월 전부터 복직투쟁을 하던 상용직 4명과 6월 31일자로 해고된 환경미화원 배홍국·김성규 조합원이 복직투쟁을 하겠다고 결단을 내려서 평택은 6명의 해고 조합원들이 복직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나머지 조합원들은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투쟁에 결합했다.

평택분회 해고 조합원들은 노조가 마련해 준 승합차에 방송시설을 장착하고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시청 앞에 차를 세우고 장송곡과 민중가요를 틀었다. 여차하면 해고 조합원들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라디오방송의 DJ처럼 멘트를 날렸다. 평택분회는 민간위탁에 맞서는 어려운 투쟁을 벌여야 했지만 배홍국 조합원이 복직투쟁을 하는 조합원들의 대표가 돼서 잘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김포분회는 2002년 7월 1일 결성됐는데 시 소속의 가로반 환경미화원과 시설관리공단 선별장에서 일하는 환경미화원들이 주축이 됐다. 김포분회의 단협 체결투쟁은 홍희덕 사무처장이 주도했다.

홍희덕 사무처장은 김포분회 조합원들을 보면서 몇 년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설관리공단 소속의 선별장 환경미화원들은 원래는 시 소속이었다가 민간위탁돼 공단으로 오게 됐다고 했다. 그들은 공단으로 가도 임금과 근로조건이 똑같다는 공무원들의 말을 믿었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홍희덕 사무처장은 김포분회 단체협약 체결에 열과 성을 다했다.

1999년 8월 9일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 설립 때부터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노조활동을 해 온 홍희덕 사무처장에게 공무원들을 상대로 하는 교섭은 어려운 축에 속하는 일이 아니었다. 김포분회 조합원들은 자신들처럼 초등학교를 나왔다는 홍희덕 사무처장이 공무원들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홍희덕 사무처장만의 특별한 비법이 아니라 경기도노조가 갈고 닦은 비법 중 하나였다. 홍희덕 사무처장은 교섭이 있으면 조합원들에게 대오를 형성해서 단결된 모습을 보이도록 했다. 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지면 조합원들에게 밖에서 박수를 치게 한다거나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게 해서 공무원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지친 공무원들은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교섭이든 투쟁이든 조합원들의 힘을 믿을 때, 그리고 조합원들이 그 힘을 보여 줄 때 비로소 성과를 낼 수 있다.

홍희덕 사무처장은 아직 민간위탁이 되지 않은 시청 소속 가로반 환경미화원들의 단협에 민간위탁시 노조와 합의한다는 문구를 넣기 위해 두 달 동안 파업을 진행시켰다. 이 문구를 넣는 데에는 결국 실패했지만 만 57세이던 정년을 만 60세로 늘리는 성과를 올렸다. 김포분회의 가로반 환경미화원들은 시청과 10월 30일에, 시설관리공단 환경미화원들은 12월 3일에 단협을 체결했다.

2003년 연말이 다가오면서 상용직 임금 집단교섭이 타결됐다. 임금인상 내용은 △근속가산금 기준액 20% 인상(30% → 50%) △교통보조비 월 2만원 인상(월 10만원 → 월 12만원) △명절휴가비 연 50% 인상(연 100% → 150%) △가계지원비 연 100% 인상(연 100% → 200%) 등이었다. 임금인상분은 2003년 1월 1일부터 소급적용하기로 했다.

각 분회들도 단협 체결 투쟁의 결실을 보게 됐다. 공무원들의 완강한 태도로 교섭에 진전이 없자 기업별 노조로 전환까지 생각했다던 용인분회는 노조의 지원과 조합원들이 각오를 새로이 하면서 끝까지 버틴 결과 11월 7일 단체협약을 체결하게 됐다. 의정부지부는 시설관리공단 및 의정환경과 12월 11일과 30일에 각각 단협을 맺었다.

부천(12월 15일)·화성(12월 18일)·광명(12월 30일)·안양(12월 30일)·과천(12월 31일)·포천(12월 31일) 분회가 해를 넘기지 않고 단체협약 투쟁을 마무리 지었다. 고양분회가 1월 14일 단협을 갱신하면서 경기도노조의 2003년 임단협 투쟁은 일단락됐다.

2004년 1월 14일 경기도 31개 자치단체 가운데 18개 지역에 분회를 둔 경기도노조는 조합원 총회를 열어 제3기 임원선거를 실시했다. 노조는 총회를 열기 전 조합원 의견수렴과 상집과 중집회의를 거쳐 임원선거가 경선이 아닌 찬반투표가 되도록 했다.

총회에서는 전체 조합원 1천251명 가운데 1천35명(82.7%)이 투표에 참여해 홍희덕 위원장 후보가 96.3%의 찬성률로 당선됐다. 자진해서 부위원장 후보로 물러난 김헌정과 함께 김영철·조창하·홍사수 조합원이 부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경기도노조 3기 집행부에서 이미숙 조직국장은 사무처장을 맡았다.

내 시선은 전국을 향하고 있다

나는 경기도노조 3기 임원선거에서 위원장으로 출마하지 않았다. 내가 구속된 43일 동안 일부 간부들이 일으켰던 뒷공론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조직 내에 그런 일들이 벌어졌음에도 홍희덕 사무처장님을 비롯한 간부들이 흔들리지 않고 수습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부터 명실상부한 ‘조합원 중심주의’를 실현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디 진정한 신뢰란 역경 속에서 확인되고 굳어지는 것이다. 삼촌뻘 되는 연로하신 조합 간부들에게 마음고생을 시켜 죄송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잘못하지 않았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 노조의 간부들은 지난 4년 동안 치열하게 교섭과 투쟁을 병행해 왔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활동이다. 이제 노조 간부들이 스스로 일상활동을 수행할 역량을 확보했다. 다시 말해 어느 한 사람의 개인기에 의해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현장 조합 간부들의 힘으로 굴러가는 조직이 된 것이다.

물론 ‘조합원 중심주의’라는 게 현장 출신 위원장이 나온다고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가 위원장을 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of the people’이나 ‘for the people’은 어쩌면 입에 발린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노른자는 ‘by the people’이다. 노동자의 조직, 노동자의 권력은 각성한 노동자들이 장악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해방으로 가는 길 아닌가.

그동안 나는 경기도노조의 ‘사령관’이었다. 나는 경기도노조에게 한 방울의 누수도 없는 중앙집중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나는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의 주인이 되려면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믿었다. 일상활동에 관한 한 경기도노조는 ‘조합원 중심주의’를 실현했다. 그렇다면 형식도 그에 맞게 바꿔야 한다. 그에 대한 답이 홍희덕 위원장이었다.

나는 부위원장을 맡았다. 교섭과 투쟁에서 다져진 단결과 자신감으로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기도노조의 질적 전환을 모색해야 할 때였다. 지난 4년 동안 우리가 얻은 성과와 보람은 엄청나게 컸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면 안 된다. 그게 내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였다.

노조가 해결해야 할 과제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게 민간위탁 저지다. 의정부의 파업도 민간위탁을 되돌리기 위해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시설관리공단과 단체협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파주에서도 그랬고 평택에서는 수십 명의 해고자까지 나왔다. 각 분회들의 단협 체결투쟁에서 핵심적인 쟁점은 민간위탁시 노조와 합의냐 협의냐 하는 것이었다. 조직력이 강한 분회는 합의를 따냈지만 그렇지 못한 분회들도 있었다. 민간위탁 저지는 노조의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자치단체들이 민간위탁을 실시하게 된 배경은 국민의 정부가 추진한 공공부문 구조조정 정책이었다. 정부는 기능직 노동자의 외부용역·외주화를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중요한 수단의 하나로 제시하고 행정자치부 ‘민간위탁업무처리지침’으로 민간위탁을 적극 권고했다. 인센티브제도까지 도입했다.

참여정부 역시 국민의 정부가 실시한 구조조정 정책을 계승했으며 2003년 8월 지방분권특별법을 공포해 광범위한 재정권한을 자치단체에 부여했다. 이에 따라 행자부는 ‘환경미화원 임금지침’이 지방행정 분야에 이양할 수 있는 항목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당초 행자부는 ‘환경미화원 임금지침’을 2003년 특별법 공포와 함께 자치단체에 넘기려고 했으나 노동계의 반발로 2005년으로 미뤘다.

중앙정부의 ‘환경미화원 임금지침’이 없어지고 결정권이 자치단체에 넘어간다는 것은 환경미화원들에게는 재앙이다. 서울의 강남과 일부 공단지역을 제외하면, 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는 형편없다. 예산을 절약한다는 명분으로 환경미화원들의 임금부터 깎으려 들 게 틀림없다. 특히 시설관리공단이나 청소업체 사업장의 경우에는 임금을 결정할 공인된 기준이 사라짐으로써 사용자 측의 전횡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민간위탁도 막지 못하고 있는데 그나마 환경미화원들의 임금기준이 되는 행자부 지침마저 없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행자부 임금지침 폐기를 막기 위해서는 민주노총 안에 흩어져 있는 환경미화원 노동자들을 단결된 틀로 모으고 한국노총 연합노련도 함께 투쟁하도록 조직해야 했다.

2003년 12월 경기도노조와 한국노총 연합노련 소속 경기도지역 환경미화원노조 6개가 모여 경기지역자치단체 및 환경분야노조협의회를 출범시켰다. 내 시선은 경기도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궁극적으로는 환경시설관리 노동자들이 지역과 직종을 넘어 단일대오로 뭉쳐 민간위탁 저지를 위한 대정부 투쟁에 나서야 한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지역과 직종을 넘는 단일대오란 모든 노동조합의 오랜 숙원이다. 그런데 비슷한 성격의 노조들이 단일대오로 뭉친다는 게 상식적으로 보면 쉬울 것 같은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하나 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나는 이런 현실에 순진하게 접근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노조들이 작은 기득권을 놓고 다투는 모습에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민주노총 공공연맹 공공시설환경 관련 노조들의 조합원 숫자는 3천여명, 한국노총에 속한 노조들은 1만6천명 정도다. 전국적으로 보면 환경시설 관련 노동자들이 6만여명 된다. 우선 민주노총 내 공공시설 환경관련분과의 노조들이라도 뭉쳐서 전국단일조직을 만들어야 되는데 이게 쉽지 않았다.

2002년 11월 24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민주노총 공공연맹 소속 환경미화원·상용직·정화조 노동자들이 모였다. 서울·경기·대전·충남·충북·광주 등 전국 각 지역에서 상경한 조합원들은 ‘민간위탁 저지, 차별임금 철폐, 고용안정 쟁취, 전국단일노조 건설을 위한 전국 환경미화·상용직·정화조 노동자 결의대회’를 열었다.

공공연맹에서 경기도노조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노동조합들이 이렇게 모이는 데 3년이 걸렸다. 2000년 12월에 처음으로 환경시설관리 노동조합들 간 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이후 대표자회의가 정례화됐고, 2002년 2월에는 공공연맹 대의원대회의 결정으로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위원회가 신설됐다.

분과위 위원장은 서울상용직노조의 이동엽 위원장이었고, 나는 분과위 소속 노조 가운데 사용자가 자치단체가 아닌 전국시설관리노조를 제외한 16개 노조가 참가한 전국공공시설환경관리노조 건설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날 집회는 전국공공시설환경관리노조 건설준비위원회 주최로 열렸는데 참가하기로 했던 서울상용직노조와 몇몇 노조들이 불참을 했다. 그 전날 참가 인원수를 확인하기 위해 연락했을 때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전국공공시설환경관리노조를 만들어야 할 주축이 서울상용직노조와 경기도노조였다. 서울상용직노조 조합원이 1천700여명이고 우리가 1천500여명이다. 이외에 대전상용직노조가 200여명이었고, 광주권의 노조들이 160여명, 충남 200여명, 충북 30여명 정도였다.

서울상용직노조가 불참한 이유는 이동엽 위원장이 전국 상용직 노동자 조직을 만들 계획이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소산별(업종)노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원칙적으로 따져도 크게 뭉칠수록 더 힘이 생기는 법이다. 내가 생각하는 전국단일조직의 상은 자치단체에 직간접으로 고용된 노동자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노동조합이었다.

경기도노조의 조직화 경험을 보더라도 한 자치단체의 환경미화원이나 상용직 노동자들이 조직되고 나면, 그 자치단체에 직간접으로 고용돼 청사관리·주차관리·매표요원·도서실 비정규직 등 다양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유리했다.

이날 집회가 기대했던 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전국공공시설환경관리노조 건설준비위원회는 유명무실해졌다. 2003년 4월부터 내가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위원장을 맡았지만 분과 대표자회의마저 장기간 소집되지 못했다. 내가 구속돼 공백이 생긴 탓도 있다.

2004년 5월 나는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위원장으로 다시 선출됐다. 나는 우선 분과 대표자회의라도 정례화하고 투쟁 사업장 지원을 중심으로 공동투쟁·연대투쟁의 기풍을 세우면서 전국단일조직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우리가 함께해야 할 조직은 공공연맹 바깥에도 있었다. 각 지역의 일반노조에도 우리처럼 환경미화원과 상용직 노동자들이 조합원으로 있었다. 전국 각 지역의 일반노조들은 2004년 1월 대표자회의의 체계를 마련했는데 전국일반노조 대표자회의에 우리 노조도 참관 자격으로 참석하기 시작했다.

일반노조는 기업별 노조가 포괄하지 못하거나 혹은 하지 않는 중소·영세·비정규 노동자들의 노조다. 2000년 4월 창립한 부산일반노조가 전국 최초의 일반노조로 알려져 있다. 부산일반노조는 청소업체 환경미화원들을 조직해서 단협 체결 투쟁을 벌였고, 이후 부산조선비치호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정리해고 철회투쟁 등으로 주목을 받았다. 2001년에는 충남·경남·서울 등 여러 지역에서 일반노조들이 속속 생겼다.

우리 노조도 엄연한 지역일반노조이고 부산보다 석 달 빠른 2000년 1월에 창립했다. 하지만 경기도노조는 환경미화원들만으로 출발했다. 조직화도 자치단체에 직간접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굳이 창립일을 따져서 우리가 전국 최초의 일반노조라고 우길 생각은 없다.

일반노조의 대부 격인 부산일반노조의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 충남·경남·서울 등 일반노조 간부들이 부산에 모여서 워크숍을 가끔씩 했다. 형편이 되면 나도 갔다. 2002년에는 부산일반노조에 교육을 하러 간 적도 있다. 부산일반노조에는 청소업체 소속 환경미화원 400여명이 조직돼 있었다.

경남일반노조와도 인연이 깊다. 2002년 창원시청 환경미화원들이 경남일반노조로 조직됐을 때 우리 노조 간부 몇 사람과 함께 창원으로 가서 환경미화원들이 노조로 뭉쳐 사용자측과 싸울 때 핵심적인 사안이나 쟁점 사항을 알려 주고 온 적이 있었다.

우리 노조도 일반노조이기는 하나 조합원 대부분이 환경미화원과 상용직 노동자들이라 지역업종노조의 성격이 컸고, 나는 공공연맹 내에서 전국단일조직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 지역일반노조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지역일반노조들은 연맹을 기반으로 하는 기존의 민주노조운동 체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전국일반노조 대표자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충남일반노조의 최만정 위원장은 이런 차이보다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노조라는 공통점을 인정하면서 일반노조 대표자회의에 우리 노조가 편안하게 참관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줬다.

경기도노조 부위원장을 맡은 2004년부터 나는 전국단일노조를 만들기 위한 활동에 모든 관심을 집중했다. 초심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조직이 어느 정도 커지고 안정이 되면 작은 것에 집착하게 마련인데 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경기도노조는 우리의 보금자리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이때부터 나는 전국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다녔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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