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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제 김헌정 14] 문공달 씨의 사연1 : 200만원을 바치고 ‘청소부’가 되다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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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우리는 해방으로 간다

나의 영원한 ‘공범’·철문을 부수고 동지들 품으로 달려가고 싶다·가로분회와 의정환경분회의 동시파업·십 년 전·‘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이게 단협이냐? 항복문서지!”·김주실 씨의 선택 “우리도 노조 해요~”·파업도 업무복귀도 노동자의 권리·돈 많이 걷는 경기도노조?·문공달 씨의 사연1 ; 200만원을 바치고 청소부가 되다·문공달 씨의 사연2 ; “내 뒤에는 경기도노조가 있다”·‘진짜 공무원’ 민상호 씨·송양권 부분회장의 고백 “시장님, 우리 요구를 빨리 들어주지 않아 감사합니다”·악랄한 안산의 청소업체들·물러서지 않는 안산분회·민간위탁이라는 ‘공공의 적’·파벌은 용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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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이 걷는 경기도노조?

나는 노동조합은 대중조직이 분명한 만큼 노조활동으로 인해 조합원들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가해지면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대의와 명분으로 버틴다는 것은 일시적일 뿐이고, 경제적인 피해가 불어나면 노조의 기반은 무너지게 된다. 나는 경기도노조의 손님이 아니었다. 경기도노조가 항구적인 전망을 갖기를 바랐다.

하지만 노조활동, 특히 집회나 파업 같은 투쟁을 하려면 돈이 들게 돼 있다. 이게 모순이다. 돈이 없고 먹고살기 어려워서 노조를 만들었는데, 이 노조활동을 하는 데에도 돈이 들어가야 하니 말이다. 현대자동차 같은 대공장 노동조합이라면 돈 걱정이 없겠지만 우리처럼 작은 사업장 노조는 달랐다. 이것이 나의 고민이었다.

경기도노조는 초창기에 조합원들이 그동안 받지 못했던 야간수당과 휴일수당을 소송을 통해 받아 냈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의 파업 때 처음으로 조합원들은 못 받은 임금과 수당을 되찾았는데, 이때 조합원들 모두가 받은 돈의 20%를 노조에 특별기금으로 납부했다. 내 아이디어였다. 솔직히 말하면 망설여지는 점도 없지는 않았다.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뒤늦게 받은 것인데, 일부를 노조에 내놓으라고 하는 게 마치 수고비를 달라고 하는 느낌이 들어서 무척이나 민망했다. 그러나 이 돈은 파업투쟁기금으로 쓰일 돈이었고 장차 노동조합이 무궁무진 성장하게 될 종잣돈이었다.

그래서 작심을 하고 말을 꺼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의정부 조합원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의정부 조합원들이 소송으로 돌려받은 금액의 20%를 투쟁기금으로 적립할 수 있었던 덕분에 조합원 전체가 93일 동안 파업을 할 수 있었다. 이 원칙은 이후에 건설되는 모든 분회에 적용이 됐고 2002년에 가서는 아예 노조 규약으로 정했다. 조합 가입 전에 발생한 체불임금을 노조에 가입한 후 받았을 때는 체불임금 총액의 20%를 특별기금으로 납부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포천이나 고양에서 단협을 체결하기 위해 1년 가까이 투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특별기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연작전으로 나오는 자치단체에 맞서 노조 역시 급할 것 없다고 배짱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재정적으로 안정이 됐기 때문이다. 의정부와 포천은 조합원수가 적었지만 투쟁기금으로 장기투쟁을 할 수 있었다. 고양분회는 조합원수가 많아서 특별기금을 모으기 전에 조직을 담당할 상근간부를 한 명 더 채용할 수 있는 여력이 됐다. 또 고양분회가 생길 때부터 노조가입원서에 자동이체 동의서를 첨부했고 투쟁조끼와 머리띠 값을 따로 받았다. 나는 조합원들이 노조 가입이 곧 투쟁이고 스스로 돈을 내서 싸운다는 자긍심을 갖기를 원했다.

수적으로 많은 고양분회 조합원들 덕분에 조합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다. 경기도노조는 규약에 평균임금의 1.5%를 조합비로 책정했다. 그런데 환경미화원은 일괄적으로 3만원을 조합비로 내도록 했다. 행자부 지침으로 환경미화원의 임금이 상용직이나 자치단체 일용직보다 높았던 까닭이다.

2001년 1월 포천분회에서 전임자가 한 명 나오기 전까지는 나, 김인수 조사법률국장, 조명심 총무국장, 이렇게 셋이서 북 치고 장구 치는 노릇을 했다. 양미경 부장은 민주노총 경기북부지구협의회 조직부장이니 지원은 해도 전적으로 결합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일이 되려는지 2001년 2월 보암산업노조가 해산하고 경기도노조에 가입하면서 전임자 두 명이 더 생겼다. 이 역시 지난날에 뿌린 씨앗들이 열매를 맺은 결과였다.
의정부 투쟁 이전인 경기북부노동정책연구소 시절에 나는 지역노조를 만들기 위해 이미 결성돼 있는 노조들과도 회의구조를 만들었다. 가칭 경기북부지역노조 추진위원회에는 북두노조·대우금속노조·보암산업노조·삼화정밀노조가 참여했다. 나는 덕계노동자사랑방 때부터 이들 노조를 지원하는 활동을 해 왔으므로 신뢰는 충분히 쌓여 있었다. 참석한 4개 노조의 위원장들 역시 지역노조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4개 노조는 모두 민주노총 가입노조로서 경기북부지역에서는 강성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원래부터 사업장 규모가 작은 편이었던 이 노조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구조조정으로 조합원수가 더 줄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삼화정밀은 1998년 부도를 맞았다. 유망 중소기업이었는데 기업주의 ‘문어발 경영’으로 부채액이 1천억원이 넘었다고 했다. 기업주는 도망가고 노조가 회사를 지키기 위해 4개월 동안 공장을 돌리고 제품을 팔았다. 노동자들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도 소용없이 회사는 경매로 넘어갔고 노조는 겨우 명맥만 남아 있었다. 보암산업노조와 북두노조도 조합원이 100명이 되지 않았고, 대우금속노조 조합원이 150여명 정도 됐다.

이런 상황이라 이들 4개 노조는 나의 제안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매우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과정이었다. 지역노조를 건설하자는 대명제에는 4개 노조가 모두 동의했다. 그런데 상근자나 조합비·교섭권 등에서는 좀처럼 합의를 볼 수 없었다. 나는 조합비든 상근자든 지역노조 중앙으로 모든 권한과 예산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북두노조와 대우금속노조는 분회의 자율성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기존 노조에 2명의 전임자가 있다면 나는 2명 모두를 지역노조 본조에 배치하자는 의견이었고, 노조는 1명만 지역노조 본조에 보내고 1명은 분회에 남겨 업무를 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북두노조와 대우금속노조의 위원장들은 기업별 노조에 익숙한 조합원들을 설득하려면 조직체계 변화가 완만해야 한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제반 여건이 취약한 지역노조다. 처음부터 역량을 분산하고 분회에 자율성을 허락하게 되면 지역노조는 느슨한 협의체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이리하여 경기북부지역노조 추진위 활동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는데, 보암산업노조가 과감하게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보암산업노조는 전임자가 변형석 위원장 한 명뿐이었는데, 장광수 사무장이 지역노조운동에 힘을 싣기 위해 개인적으로 6개월 휴가를 내고 전임자로 결합했다. 이제 경기북부 쪽에는 활동의 기반이 어느 정도 마련된 셈이어서, 나는 경기남부로 눈을 돌렸다.

2001년 2월 10일 경기도노조는 경기남부 쪽을 조직할 담당자로 이미숙 씨를 채용했다. 이미숙 씨는 1962년생으로 전노협 시절에 정심전자에서 노조위원장으로 맹활약했고 전노협 안양지구협의회 의장과 경기남부노련 부의장을 맡기도 했다. 이미숙 씨는 3개월의 수습기간을 거쳐 조직국장으로 임명됐다. 이 국장은 노조활동으로 구속까지 됐던 노동조합 활동가였고 경기남부지역의 노동현장 사정에 정통했기에 노조로서는 꼭 필요한 활동가였다.

2001년 4월 14일 경기도노조는 조합원 총회를 열고 조직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조합원총회-대의원대회-중앙운영위원회(위원장·부위원장·사무처장·정책실장·지부장·부지부장·직종별 분과위원장·각 분회장·부분회장·각 지부 및 대의원 가운데 호선된 약간명)-중앙집행위원회(위원장·부위원장·사무처장·정책실장·각 국장·직종별 분과위원회 위원장·각 지부의 지부장·부지부장·분회장)-상무집행위원회(위원장·부위원장·사무처장·정책실장·각 국장·부장)로 이어지는 의결집행단위를 만들었다.

각 사업장의 조합원들은 분회로 조직되고, 지부는 1∼2년 이상 활동하면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운영할 만큼 안정적일 때, 또는 2개 사업장 이상을 관할할 수 있을 때 중앙운영위원회에서 승인하도록 했다. 분회는 쟁의나 교섭에 독자적인 권한이 없었으나 지부는 일정한 권한을 갖도록 했다. 2001년 현재 지부는 의정부지부 하나였다.

나는 경기도노조의 조직체계를 세울 때 산별노조였던 보건의료노조의 조직구성을 벤치마킹했다. 내 아내 양미경이 2001년부터 보건의료노조의 조직부장으로 일하면서 도움을 줬다. 김인수 조사법률국장은 일주일 동안 보건의료노조에 파견을 나가기도 했다.

2001년 조합원총회에서 임원진 변동사항은 크게 없었다. 위원장 임기가 2년이었으므로 내가 그대로 위원장을 맡았고, 나천봉 쟁의부장님과 포천의 홍사수 조합원이 부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사무처는 변형석 보암분회 분회장이 맡았고 홍희덕 사무장님은 의정부지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93일 동안의 파업 이후 조합원과 비조합원의 갈등, 의정환경의 노조 탄압 문제 등 산적한 현안이 많았기에 의정부 조합원들은 홍희덕 지부장님을 원했다.

노조 집행위원회의 김인수 조사법률국장과 조명심 총무국장은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조직국은 이미숙 국장과 보암의 장광수 사무장이 맡았다. 전임자가 된 포천의 전순영 분회장은 교육을 담당했다.

나는 보암분회나 포천분회에서 나온 전임자일지라도 소속 분회에 한정된 활동을 하지 않고 조합의 모든 분회와 사업장을 대상으로 활동하도록 했다. 기업별노조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지역노조라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다양한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쌓는 게 중요했다.

2000년 경기도노조를 창립할 때 나, 김인수 조사법률국장, 조명심 총무국장, 이렇게 세 명이 전임을 하던 것에 비하면 불과 1년 사이에 전임자들이 두 배 이상 늘었다. 그러나 이 정도 인력으로도 역부족이었다. 2001년 경기도노조의 분회는 한 달에 하나꼴로 탄생했다.

문공달 씨의 사연1 : 200만원을 바치고 ‘청소부’가 되다

2001년 1월 중순이었다. 경기도노조의 홍희덕 사무장·진흥화 회계감사·김인수 조사법률국장은 한겨울 찬바람을 마시며 성남으로 향했다. 홍희덕 사무장과 진흥화 회계감사 두 사람은 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포천은 단협으로 번듯한 노조 사무실에 전임자까지 확보했는데, 의정부는 따낸 게 거의 없었다. 공단 측은 파업 이후 조합원과 비조합원의 갈등을 교묘히 활용했다. 분회는 역부족이었다. 그 갈등은 단시간에 치유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시설관리공단분회는 눈물을 머금고 일보 전진을 위한 후퇴라고 생각하며 단협을 체결했던 것이다.

김헌정 위원장은 시무룩한 의정부의 ‘역전의 용사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성남에 가서 조직 좀 하시라”는 거였다. 김헌정은 “의정부지부가 살고 우리 노조가 발전하려면 경기도 전역으로 퍼져야 합니다”는 설명을 곁들이며 “이 일에는 의정부지부 간부님들께서 앞장서 주셔야 합니다”고 힘을 주어 말했다. 두 사람은 ‘젊은 위원장이 나이 많은 우리를 우대해서 말은 공손하게 하지만 저 말을 안 들었다가는 감당하기 어렵지’하는 심정이었다. 김헌정은 고개만 끄덕이고 실행으로 옮기지 않으면 질색을 했다. 나이 많다고 봐주는 것도 없고 꼬치꼬치 따지면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두 노동자는 ‘못생긴’ 위원장이 하는 짓이 참 기특했다. ‘어르신들은 막걸리 드시고 계시다가 조합비 내시고 가끔 가다 데모 시늉만 내 주세요. 일은 젊고 똑똑한 우리가 다 하겠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얼마나 섭섭했을까. 못 배운 자신들을 가르쳐 가면서 꼬박꼬박 동지 대접해서 함께 투쟁하자니 기특하고 예쁜 것이다.

그리고 말이야 위원장 이야기가 맞다. 경기도노조가 그야말로 경기도 전역의 환경미화원들을 깡그리 모아서 하나로 뭉치면 공단이 우리를 지금처럼 무시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성남을 조직해 보자고 이를 악물었다. 위원장은 민주노총 성남지구협의회로 가면 환경미화원들이 몇 명 나와 있을 거라고 귀띔했다. 성남시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문공달 씨는 민주노총 성남지구협의회 사무실로 가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벌써 몇 번째 방문인지 모른다. 문공달 씨는 지난 해 9월부터 노동조합을 만들어 보겠다며 동료들을 몇 명씩 모아 민주노총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민주노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노조를 만들고 싶어 하는 그의 생각을 읽은 동료 백완기 씨가 민주노총이라는 곳에 한 번 가 보라고 해서 왔던 것이다. 그런 말을 해준 백완기 씨 역시 민주노총을 잘 몰랐다. 그가 청소하던 구역에 민주노총 성남지구협의회 사람들이 나와서 집회를 자주 열었기에 익숙한 정도였다.

문공달 씨를 반갑게 맞이해 준 민주노총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하려면 함께할 동료들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친한 사람들을 데리고 몇 번 갔는데, 민주노총 사무실에 들어선 동료들은 못 올 데를 왔다는 표정으로 완전히 얼어 버리는 것이었다. 처음이라 어색해서 그런가 싶어 동료에게 한 번 더 가 보자고 하면 아예 도망쳐 버렸다. 이 팀이 안 되면 저 팀을 끌고 가고, 이도저도 안 되면 술을 미끼로 동료들을 끌고 근 반 년 동안 민주노총 사무실을 들락날락 했지만 동료들은 노조든 민주노총이든 다 싫다고 했다. 싫다는 동료들을 어르고 달래서 이유를 들어보면 종당에는 해고가 무섭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기야 문공달 씨도 해고는 두려웠다.

이것 말고도 이유는 또 있었다. 문공달 씨는 민주노총 사람들이 생각보다 어린 데 놀랐다. 아들 나이의 젊은이들을 믿고 노조를 할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섰고,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문공달 씨도 그랬는데 동료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도 지쳐서 노조를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민주노총에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이었다.

문공달 씨는 한풀 꺾인 모습으로 민주노총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안에는 의정부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젊지 않았다. 가까이 가니 비누냄새가 났다. 그는 자기 앞에 앉은 두 사람이 환경미화원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챘다. 한량이 아닌 다음에야, 저녁 시간에 진한 비누냄새를 풍기는 늙수그레한 자신 또래의 사내라면 환경미화원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환경미화원들은 일을 마치면 집에 가서 꼭 씻고 다시 볼일을 보러 나온다.

의정부의 환경미화원과 성남의 환경미화원이 한자리에 앉았다. 홍희덕 사무장은 의정부 환경미화원들이 노조를 만든 이야기를 천천히 설명했다. 진흥화 회계감사도 곁에서 거들었다. 문공달 씨는 가장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노조를 만들다 해고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이게 그가 가장 궁금했던 것이었다.

노조를 만들다 보면 자기 한 몸만 해고되는 것도 아니고 동료까지 다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니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진흥화 회계감사는 자신은 구속돼서 감옥까지 갔지만 해고되지 않았고 지금도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홍희덕 사무장은 문공달 씨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만약 일이 잘못돼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외롭게 혼자 싸우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고 다짐 했다. 이들 곁에 있던 김인수 조사법률국장이 서류를 꺼내 문공달 씨에게 내밀었다. 포천의 환경미화원들이 사용자 측과 맺은 단체협약이라고 했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읽어 보던 문공달 씨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노조를 만들어서 단체협약이라는 걸 맺으면 여기에 적힌 대로 공무원들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노조와 상의를 해야 되느냐고 재차 물었다.

김인수 국장이 단체협약에 대해 좀 더 설명하자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다.

“지금 당장 나 혼자라도 노조 가입 할랍니다!”

지난 6개월 동안 문공달 씨의 입 안에서만 맴돌던 말이 순식간에 툭 튀어나와 버렸다.

홍희덕 사무장은 약간 흥분한 문공달 씨를 진정시키면서 동료들을 모으라고 했다. 노조를 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긴 문공달 씨는 “내가 총대를 메겠다”고 동료들에게 선언했다. ‘노조는 싫다’던 동료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그는 10여명을 모아서 교육하는 날을 잡았다.

그날이 문공달 씨가 김헌정 위원장을 만난 첫날이었다. 솔직히 위원장은 첫눈에 호감이 가는 인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위원장은 공무원처럼 말하지 않았다. 문공달 씨가 아는 배운 사람이라면 공무원들이다. 그들은 늘 알쏭달쏭한 말만 했다. 그가 듣기로 위원장도 배운 사람이라는데 그이는 툭 터놓고 말했다.

“노조는 임금 올리고 고용보장 받으려고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답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공달 씨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그는 ‘요꼬’라 불리는 편물기술자였다. 집에 편물기계를 들여 놓고 아내와 쉴 틈 없이 일을 했지만 돈이 모이지는 않았다. 일감을 준 업체들은 사정이 어려워지면 부도를 내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납품한 대금은 한 푼도 못 받고 노임만 떠안게 되는 일이 몇 차례 반복되고 나자 문공달 씨는 궁지에 몰렸다. 남의 집 지하에 월세로 살았다.

첫 아이가 대학에 가던 1990년 그해는 더 어려웠다. 아이 등록금을 구하지 못해 목을 늘어뜨리고 있다가 그는 환경미화원인 앞집 아저씨에게 일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앞집 아저씨는 그냥은 안 된다고 했다. 문공달 씨는 이미 빚이 1천만원이나 됐지만, 그 어려운 와중에 200만원을 구해 담당 공무원에게 바치고 환경미화원이 됐다. 이렇게 해서 문공달 씨는 성남시 청소차의 상차원이 됐다. 새벽에 청소차가 동네 입구에 들어오면 주민이 쓰레기를 직접 들고나와 버리던 시절이었다. 대개 주민들은 집 앞에 쓰레기를 내놓고 상차원에게 돈을 주고는 자기 대신 청소차까지 들고 가라고 했다. 이게 가욋돈이었는데, 문공달 씨는 실은 이 돈을 보고 환경미화원이 된 것이었다.

문공달 씨는 근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잠깐 눈을 붙이고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또 일했다. 밤새 단대동 고지대의 골목골목을 오르락내리락 훑으며 쓰레기더미를 수거해서 청소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내려다 놓았다. 아내도 거들었다. 아이들이 도울 때도 있었다. 몇 년을 일하자 아이들 공부시키고 8천만 원짜리 집 한 칸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때는 노조 생각을 못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청소업무 담당 공무원이나 쓰레기차 기사나 상차원이나 다툴 일이 없었다.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돈이면 다 해결됐기 때문이다. 상차원들이 주민에게 받은 돈은 기사와 담당 공무원에게도 갔다. 기사는 상차원이 밤새 끌어 모은 쓰레기를 업무 시작 전에 적환장에 가서 부려놓아야 하므로 상차원에게 돈을 받았다. 공무원들은 기사들이 청소차를 업무시간 외에 움직이는 것을 눈 감아 주고 돈을 챙겼다. 세상에 벼룩의 간을 빼먹어도 유분수건만, 문공달 씨는 참았다. 그는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했으므로 다른 수가 없었다.

종량제가 실시되자 상황은 변했다. 종량제 봉투와 함께 부수입은 날아갔다. 그때부터 공무원들은 위계질서를 내세우며 기사나 환경미화원들에게 군기를 잡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기사들대로 자신들이 공무원에게 받은 수모를 환경미화원에게 되돌려 주었다. 부수입을 바치지 않는 환경미화원은 토끼 사냥이 끝나자 쓸모가 없어진 사냥개 신세였다. 종량제 이전에도 인간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다들 돈을 생각하고 견뎠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문공달 씨는 이런 시절을 겪었기에 ‘돈 때문에 노조를 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만 살려고 노조를 해서도 안 된다’는 김헌정 위원장의 말에 가슴을 쳤던 것이다. 그는 김헌정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진정성을 느꼈다. 그가 진짜 듣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만일 김헌정이 임금인상이나 고용보장과 같은 듣기 좋은 말만 번지르르 하게 늘어놓았다면 문공달 씨의 노조에 대한 두려움은 다시 도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짐승처럼 사는 게 아니라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문공달 씨의 마음속에 어쩌면 경기도노조가 우리 환경미화원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싹텄다. 그는 김헌정 위원장의 교육을 받으며 혼잣말을 했다.

“그래, 까짓것 한 번 해 보자.”

이게 문공달 씨의 사연이었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박미경 작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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