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말레이시아의 페탈링 자야에서 세계 최대의 화학회사인 독일기업 바스프(BASF)에서 일하는 아시아지역 노동조합 간부들이 역량강화 회의를 열었다. 여기에는 말레이시아·한국·일본·인도네시아·인도에서 온 바스프 공장 노조간부 30명이 참가해 노사관계 현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바스프 독일 본사의 노동자들은 독일화학에너지광산노조(IGBCE)가 대거 조직하고 있어 IGBCE 국제국에서 독일을 대표해 참가했다.

바스프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정책이 모범적인 회사로 유명하다. 회사 스스로 각종 공식문건을 통해 국제노동기구(ILO) 8개 핵심협약,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국제연합(UN) 글로벌 콤팩트를 지지·증진한다고 선언해 놓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회사의 좋은 약속들이 실제 개발도상국의 공장에서 제대로 이행되고 있느냐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노동조합 가입과 조직의 자유, 단체교섭권 보장, 동일노동 동일대우, 차별 금지, 강제노동과 아동노동의 근절, 자유로운 노조 활동의 보장과 이를 위한 편의 제공, 노동자 정보권과 협의권, 직업훈련과 숙련개발 등 회사 스스로가 약속한 국제기준의 내용들이 침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을 제외하고는 재무보고서를 비롯한 기본적인 회사 정보가 노동자 대표에게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 이윤이 얼마인지, 매출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몇 퍼센트인지 임금·단체교섭을 위한 기본 정보는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노조간부들이 조합원들의 임금 정보조차 갖고 있지 못했다. 아웃소싱· 구조조정·신기술 도입·생산방식과 직무내용 변경·배치전환·채용 등 노동조건과 직결된 회사 정책을 결정하는 데 노동조합이 전혀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보권과 협의권의 부재는 당연히 단체협약의 질 저하로 이어졌다. 단체협약은 임금과 노동시간 등 직접적인 노동조건이 주를 이룬 반면 유급 노조활동 보장이나 편의시설 제공 등 노동조합 활동을 위한 권리와 관련한 조항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반면 “명예퇴직 실시 권한은 전적으로 회사에 있다”, “아웃소싱 권한은 전적으로 회사에 있다”, “세 번 지각하면 고용계약을 해지한다”, “노조의 의무는 사용자를 도와 생산성 향상을 위한 작업규율을 노동자와 조합원에게 강제하는 데 있다”는 조항이 단체협약을 채우고 있었다. 대부분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고 회사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내용들이다.

아시아 각국 현장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앞서 설명한 국제기준들을 바스프 본사가 독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약속했다는 독일 노조간부의 설명에 아시아 참가자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뿐이었다.

한국과 일본 공장의 임금 수준은 다른 참가국들과 비교해서 열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인도네시아 참가자는 한국에서 만드나 인도네시아에서 만드나 시장에서 같은 가격에 팔리는데, 임금 격차가 열 배가 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임금 문제인지라 격론이 일었고, 결론은 임금이 회사의 주장처럼 생산성이나 이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비용에 근거해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참가자들은 정리했다.

임금이 높더라도 돈이 되는 한 회사는 고용을 유지하고, 임금이 낮더라도 이윤이 안 되면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회사가 아무리 좋은 정책을 갖고 있더라도 노동자들의 의식수준이 낮고, 노동조합의 힘이 약하며, 민주주의가 부실하면 소용없고, 노동자들이 믿을 것은 스스로의 힘과 투쟁뿐이라는 결론이었다. 독일 노조 참가자도 현지 노동자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투쟁할 때 자신들이 연대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말했다.

회의를 끝내면서 인도네시아 참가자가 한국은 어떤 이유로 일본보다 임금이 높고 단체협약도 잘돼 있냐고 질문을 던졌다. 한국 노조간부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없었다면 한국 상황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노동조합이 공장 안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장 밖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사회 전체적인 발전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의견이 뒤따랐다.

참가자 모두가 건강하고 민주적인 노사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회사의 좋은 정책보다 노동조합의 강한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한 회의였다. 바스프 본사가 내놓은 CSR 정책의 내용도 강한 노동조합과 발전된 민주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노조역량 강화를 위해 국가별 바스프 노동조합 협의회를 활성화하고, 단체협약 교환을 비롯해 공장 간 정보 교류를 촉진할 것을 약속했다. 바스프 아시아 노동조합 역량강화 회의는 자본의 세계화에 발맞춰 노동조합의 대응도 세계화돼야 함을 확인한 자리였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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