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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기획] 감정노동자들의 미소 뒤에 숨은 '깊은 상처'폭언·성희롱·인격무시에 인사불이익까지 일상적인 스트레스 … "회피할 수 있는 권리 달라”
   
▲ 고객과 감정노동자가 ‘거인’ 대 ‘노동자’의 관계가 아닌 평등한 관계가 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높다. 대표적인 감정노동자인 홈플러스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4일 오후 서울 역삼동 홈플러스 본사 앞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구태우 기자

올해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은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27)는 작품 속 거인 캐릭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피시방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얻었다. 술에 취해 말이 통하지 않는 ‘손님’을 상대하면서 느꼈던 공포가 ‘거인’을 탄생시켰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거인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생김새를 하고 있지만 흉포하게 사람을 잡아먹는다. 사람들은 거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현실에서는 어떨까. 콜센터 상담원·지하철 역무원·카지노 딜러·카페 아르바이트생 등 감정노동자들 역시 고객의 폭언과 무리한 요구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한명숙 민주당 의원과 감정노동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네트워크가 지난 8~9월 카지노 딜러 601명과 철도·지하철 역무원 64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서비스산업 감정노동자 실태조사’ 결과 감정노동자 가운데 90% 이상이 고객으로부터 폭언·성희롱을 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고객과 감정노동자가 ‘거인’ 대 ‘노동자’의 관계가 아닌 평등한 관계가 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높다.

게임에서 돈 잃고 폭언에 성희롱까지

“카지노에선 딜러의 기를 죽여야 이긴다.” 딜러와 승부를 겨루는 도박인 카지노의 특성상 손님들이 딜러의 기를 꺾어야 이긴다는 속설이 있다. 점잖았던 손님도 돈을 잃게 되면 “딜러 기를 죽여야 돈을 딴다”는 다른 손님의 충고를 듣고 변한다. 카지노는 오래 하면 할수록 돈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돈을 많이 잃게 되면 화풀이할 대상이 사실상 딜러밖에 없다.

몇 년 전까지 강원랜드 스티커가 차에 붙어 있으면 카지노 손님들이 차유리를 깨거나, 못으로 긁는 일이 빈번했다. 직원들은 점심식사를 하러 밖에 나가거나 마트에 갈 때조차 유니폼이 드러나지 않게 겉옷을 입고 갈 정도다.

강원랜드 10년차 딜러인 박아무개씨는 “돈 잃은 사람 치고 속 좋은 사람 없다고 돈을 잃으니까 이성이 마비돼 폭언을 일삼는 경우가 많다”며 “카지노에만 들어오면 직원들을 유흥업소 종업원 대하듯이 대한다”고 설명했다.

여성 딜러들에 대한 성희롱도 빈번하다. 한 여성 딜러는 “얼마 전 ‘태백산의 정기를 받아서 절대 안 ○○지네. 남자가 어떻게 할 수나 있겠어?’라는 말을 손님으로부터 듣고 너무 속상했다”고 털어놨다.

카지노 손님들 사이에서 "딜러의 얼굴 표정과 행동을 살피고 게임에 임하라"는 얘기가 돌 만큼 딜러들은 얼굴 표정을 감추고 일한다. 딜러 업무는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다른 서비스 직종보다 힘든 편이다.

박씨는 “웃으면서 손님들을 응대하라고 교육을 받지만 손님들이 욕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웃을 수 있겠냐”고 반문한 뒤 “딜러 일을 오래 하다 보면 감정적으로 피폐해지고 메마른다”고 토로했다.

승객 폭언에 노출되고 민원으로 인사상 불이익

“취객들이 행패를 부리면 신고하는 것 말고는 도망다니는 방법밖에 없다.” 17년차 지하철 역무원 김아무개씨의 말이다. 김씨는 몇 년 전 취객이 휘두르는 주먹을 제지하기 위해 팔을 잡았다가 쌍방 피의자가 됐다. 손님을 제지하기 위해 팔을 잡은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혼자 근무할 때 발생한 일이었다.

역사 안전을 담당하는 역무원들에게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자동승차권 판매기가 전면 도입된 2009년부터 야간에 근무하는 역무원들의 근무환경이 더욱 나빠졌다.

서울도시철도노조가 올해 2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공사가 운영하는 1~8호선은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역사 안전을 담당하는 역무원을 762명이나 줄였다. 전체 150개 역 중 27곳은 야간 근무자가 혼자 근무한다.

김씨는 “승객의 입장에서는 당장 급하기 때문에 일처리가 늦어지면 화를 내거나 시비를 거는 승객들이 있다”며 “역무원 혼자 근무할 때는 상황이 생겨도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탓에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승객들의 민원도 주된 스트레스 중 하나다. 민원이 생기면 역무원의 인사고과에 영향을 미친다. 상급자도 민원이 발생하면 역무원의 잘못 여부와 관계없이 민원을 올린 승객에게 사과해서 빨리 무마시키도록 종용한다. 김씨는 “악성민원도 무조건 찾아가서 빌고 빨리 합의하라고 한다”며 “민원이 잘 마무리가 안 되면 근무평가에 반영돼서 승진할 때 뒤로 밀리게 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런 상황을 피하지 못하고 누적되면서 승객을 기피하고 급기야 우울증까지 발병한다는 설명이다.

감정노동자 스트레스 풀 방법이 없다

서비스산업 감정노동자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카지노 딜러와 역무원은 감정노동으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스와 업무상 피해를 받고 있었다. 카지노 딜러 10명 중 4명(44.7%)은 자살 충동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나 실태조사에 참여한 감정노동 업종 중 가장 스트레스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고객으로부터 욕설 등 폭언을 들은 경험이 있는 카지노 딜러는 96.7%가 넘었다. 철도·지하철 역무원 중 87.8%는 고객으로 폭언을 들었으며, 86.2%는 무리한 요구를 받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고객으로 인해 피해를 받는 빈도 또한 높았다. 카지노 딜러는 월 15회 이상 고객으로부터 인격무시를 당했으며, 일주일에 한 번꼴로 고객들에게 성희롱이나 신체접촉을 당했다. 철도·지하철 역무원은 고객으로부터 무리한 요구·인격무시·폭언을 각각 월 4회 이상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치유할 뾰족한 대책은 없었다. 카지노 딜러 김아무개씨는 “남자 딜러들은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많고, 여성 딜러들은 쇼핑 등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편”이라고 답했다. 딜러 업무의 특성상 출·퇴근시간이 불규칙하다. 오전 8시, 오후 4시, 자정에 출근하는 3교대로 운영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나 취미활동을 하기가 어렵다. 강원랜드의 경우 회사 차원의 상담 프로그램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야간 근무조인 역무원의 경우 저녁 9시부터 업무를 시작해 역사 문을 닫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휴게실에서 쉬다가 오전조와 교대하는 시간인 오전 6시15분까지 일한다.

김씨는 “인력이 많으면 좀 낫겠지만 혼자 역사를 담당하다 고객들에게 피해를 입게 되면 안 좋은 기분인 상태로 다음날 아침까지 일해야 한다”며 “이런 일들이 쌓이다 보면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감정노동자 보호 위한 법 개정 시급”

전문가들은 스트레스와 폭언·인격 무시 등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회피할 수 있는 권리’를 주문했다. 한인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은 “고객에게 위협을 받을 때 자리를 회피하고, 사업주가 감정노동자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며 “제조업이나 건설업에서 위험을 인지했을 때 작업을 정지하고 대피하는 것처럼 감정노동자들도 위협받을 때 자리를 회피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연구원은 “카지노 손님이 폭언·폭력을 행사할 경우 상급자가 나서 손님을 퇴장시키거나 딜러를 교체하면 된다”며 “블랙리스트 손님의 출입통제를 엄격하게 관리하고, 출입제한 규칙이 현장에서 잘 시행되면 감정노동의 문제를 상당 부분 개선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김동완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달 30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강원랜드에서 불법·소란·폭력 행위를 막고 중독을 예방하기 위해 일정 기간 출입이 제한된 고객은 올해 8월 기준 6만4천255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출입제한 기간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규정 준수 각서를 냈다는 이유로 심의를 거치지 않고 출입제한을 풀어준 사람이 406명이나 된다.

역무원들은 악성민원에 따른 인사상 피해와 인력부족을 호소했다.

권오훈 서울도시철도노조 역무본부장은 "1인 근무는 역무원은 물론이고 시민의 안전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2인 이상 근무할 수 있도록 인력을 충원해야 한다"며 "민원 중 대부분이 화장실과 환승 등 역무원과 무관한 경우가 많은 만큼 민원으로 인한 인사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노사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한명숙 의원은 올해 5월 “근로자의 업무상 스트레스 예방과 치료를 위해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심리상담 서비스 등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이성종 서비스연맹 정책실장은 “서비스산업 대부분의 직종이 감정노동과 관련돼 있다”며 “사회적으로 감정노동을 완화하고 감정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국회 환노위에 계류 중인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산안법 개정안이 하루속히 통과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구태우  ktw9@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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