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정옥
한국노동
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

삼성반도체 출신 노동자의 백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한다는 법원 판결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이 또다시 항소를 제기했다.

1980년생인 김경미씨는 열아홉 살 때부터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2라인에서 반도체 원판을 화학물질로 씻어 내는 일을 하다 퇴사한 뒤 백혈병을 진단받고 젖먹이 아들을 세상에 남긴 채 스물아홉 살에 숨졌다. 유족은 공단에 산재보상을 신청했지만 거부당하자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해 지난달 18일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이달 4일 공단이 항소를 제기한 것이다.

공단은 항소를 제기하면서 “망인과 비슷한 공정에서 일했던 동일 상병의 근로자들이 항소를 제기한 상태에서 이 건을 포기하는 경우 항소심 사건에 대해서도 공단이 업무상질병을 인정한다는 심증을 줘 재판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댔다. 2011년 삼성반도체 사망자 황유미·이숙영씨의 백혈병을 산재로 인정한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제기했는데, 그 판결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김경미씨의 산재인정 판결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런 공단의 논리는 현재 소송 중인 피해자들은 물론 미래의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에게도 대단히 절망스러운 것이다. 김경미씨의 항소심 판결이 나오기 전에 황유미·이숙영씨가 항소심에서 승소한다면, 공단은 또다시 같은 논리를 가지고 대법원에 상고할지 모른다. 그리고 황유미·이숙영씨의 유족이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몇 년 동안 새롭게 산재를 신청하게 될 비슷한 사례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로 대할 우려가 있다.

지금까지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을 통해 공단에 산재보상을 신청한 노동자·유족은 39명이다. 이 중 삼성반도체와 엘시디 공장 출신은 36명이다. 하지만 산재로 인정받은 경우는 삼성반도체 출신 유방암과 재생불량성빈혈 피해자, 그리고 매그나칩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등 단 세 명이다. 반도체·전자산업 노동자 건강 문제 중 한국 사회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삼성반도체 백혈병이지만, 정작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제도적인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상당수 피해자와 가족들은 산재 신청을 포기하고 만다. 설령 모든 소송을 거쳐 이들이 산재보상을 받더라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차마 끝까지 기다리며 싸울 엄두를 낼 수가 없다. 특히 직업성 암은 과거 어떤 발암물질에 노출됐는지 입증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이것이 현실이라면, 한국 사회는 주어진 조건에서 직업성 암 산재보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풀어야 한다. 해법은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 병의 원인에 대한 세밀한 증거를 찾기 어렵다면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수준에서 산재인정을 할 수 있다. 삼성반도체 백혈병에 대해 법원이 내린 판결의 골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면 피해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좀 더 신속히 덜어 주고 가족 경제의 파탄을 최소화할 수 있다. 게다가 좀 더 많은 피해자들이 산재보상을 신청하게 될 것이고, 반도체 산업의 작업환경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반도체 산업의 안전보건 수준이 한 단계 진전할 수 있다.

사회가 택할 수 있는 다른 해법은 병의 원인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한 산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주 예외적인 몇 명만 산재보상을 받게 되고, 공단의 산재보험 재정지출도 아낄 수 있으며, 따라서 삼성과 같은 반도체 대기업들이 부담하는 산재보험료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 무분별한 산재신청을 막을 수 있으니 공단의 업무부담도 줄일 수 있다. 산재신청을 계기로 정부기관이 작업환경을 조사하던 기능은 반도체 회사들의 자율안전보건 관리로 대체하면 된다. 공연한 직업병 이슈 때문에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리는 대기업 이미지를 훼손하는 일도 줄어든다. 이것이 지금까지 공단과 삼성이 보여 준 입장이다.

첫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두고 암 투병을 해야 했던 김경미씨의 짧은 삶과 그녀의 죽음 뒤 온갖 아픔을 겪어 왔을 가족들의 모습 앞에 이 사회는 답해야 한다. 어떤 해법을 택하는 것이 옳은가. 옳은 답을 찾을 수 있는 주인공은 근로복지공단이나 삼성이 아니라, 피해자이자 그 가족이고 이웃이며 이 사회의 다수인 우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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