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승현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

사법연수원 시절 ‘전문기관 연수’ 명목으로 2주간 유럽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와 스페인 최대 노조 UGT, 프랑스 사법관노조 등을 방문했습니다. “선진 유럽의 노동에 대한 문화와 인식을 체험함으로써 우리나라 노동환경의 발전 방향을 모색해 본다”는 거창한 목적이었습니다. 기만적인 연수목적을 뒤로 하고 함께 온 노동법학회 회원들과 순전히 관광만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황영조라도 되는 양 몬주익 언덕을 헐떡이며 뛰어 보기도 하고, 센강은 과연 파리를 동서로 나누고 있는지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살 떼어 간다는 상인 있을까 봐 베니스에선 기념품도 안 사면서 젯밥만 탐닉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파리역 샌드위치가게 아가씨는 영어 thirteen(13)을 알아듣지 못해 일일이 손가락을 꼽아 개수를 일러 줘야 했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던 잘생긴 총각은 던져 놓듯 음식을 내려놓곤 획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놈들이 동양인이라 무시하나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마돈나의 ‘Like a virgin’에 대한 시답잖은 대화로 시작되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저수지의 개들’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보석상을 털기 위해 모인 8인의 갱들은 한 허름한 식당에 모여 아침식사 후 여종업원에게 줄 팁을 걷습니다. 모두들 여종업원을 위한 팁을 내는데 유독 ‘핑크’는 커피를 세 번밖에 채워 주지 않았다며 팁을 주길 거부합니다. 여급 사전엔 “더럽게”와 “바쁘다”는 말은 없다면서. 설왕설래 팁을 두고 말도 많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최저임금만 받는다. 여종업원은 못 배운 여자에게 최고의 직업이다. 정부는 세금에도 세금을 매긴다.” 이때 두목이 돌아와서 핑크에게 이릅니다. “난 그런 거 상관 안 해. 닥치고 1달러나 내놓으시지.”

파리에는 한 해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2천900만명에 이르는 외국인 관광객이 방문합니다. 파리역 샌드위치 가게 여종업원은 영어를 못하지만 해고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명동 거리를 지나다 보면 화장품 가게 앞에서 일본어·중국어·영어로 유창하게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기할 정도입니다. 물론 간단한 수준이겠지만 어쩌면 저렇게 외국어를 능수능란하게 바꿔 가면서 잘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에도 가벼운 패딩 하나만 걸친 채 마이크를 잡고 온종일 떠드는 그 노동자는 몸이 아파 며칠을 쉬면 바로 해고당합니다.

파리의 조그마한 음식점 종업원은 음식을 거칠게 내려놓았다고 손님에게 배부르게 욕을 집어 먹거나 테이블에 머리를 찧을 듯 사과를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장님들은 ‘고객님‘께서 불만을 표현하시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며 “해결 못하겠으면 죽여 버려라”고 알뜰하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냥 그러면 “네 알겠습니다”만을 되뇌는 것 말고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는 노동자는 그 순간 죽음을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람 죽이는 걸 파리 죽이듯 생각하고 둘러앉아 강도나 모의하는 미국의 깡패들도 자신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준 여급의 노동의 대가를 생각하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영화의 내용이니 실제와는 다를 수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손님에게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노동자가 있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지거리를 들으면서도 “죄송합니다. 고객님”을 되뇌어야 하는 노동자가 있습니다. 화장실 옆 조그만 골방에 쪼그리고 앉아 식은 밥을 씹어 삼켜야 하는 노동이 이 나라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법률원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이 땅의 처참한 노동현실을 목도하게 됐지만 저에겐 이 나라를 이렇게 바꿔야 한다며 거창한 방법을 제시할 아무런 깜냥이 없습니다. 다만 살면서 저 역시 식당에 넋 놓고 앉아 밥 빨리 달라고 채근하진 말아야겠다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정도입니다. 아직 그 정도이지만 언젠가는 이 땅의 노동자가 모두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누리며 살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합니다. 누구는 ‘일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되면 특권계층의 주권을 박탈하는 거라 악다구니를 씁니다. 하지만 결국은 일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올 겁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