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EU FTA 시민사회포럼에 참가한 국제노총(ITUC)과 양대 노총 관계자들이 한국정부에 국제노동기준 준수를 촉구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올해 8월 전국공무원노조 설립신고에 대한 정부의 4번째 취소·반려통보에 이어 이달 24일 전국교직원노조에 대한 ‘노조 아님’ 통보로 한국 정부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현황이 국제사회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부는 ILO 제87호 협약(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과 제98호 협약(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의 적용에 관한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만약 우리나라 정부가 두 협약을 비준하고 협약 내용에 맞게 국내법을 손질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전체 조합원의 0.02%(전교조), 0.1%(공무원노조)에 불과한 해직자를 이유로 거대 노조가 하루아침에 법외노조가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교조 해고자는 21명(전임 9명)이고, 공무원노조 해고자는 135명이다.

한국 정부는 91년 ILO에 가입하고 나서도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22년이 지난 2013년 현재 노정관계의 시곗바늘이 22년 전을 가리키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핵심협약 8개 중 4개만 비준

이달 현재까지 ILO가 채택한 협약은 189개다. 이 중 한국 정부가 비준한 협약은 28개다. 비준율 12.7%에 불과하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하면 185개 ILO회원국 중 비준율 120위에 머물러 있다.

협약 비준율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이유는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98년 ILO는 86차 총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되는 협약 8개를 선정했다. 그게 핵심협약이다. 좋은 일자리를 위해 회원국들이 반드시 비준해야 하고, 비준하지 않더라도 협약내용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총회의 결의사항이었다.

한국 정부는 8개 핵심협약 중 △취업의 최저연령에 관한 협약(제138호) △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 철폐에 관한 협약(제182호) △동일가치 노동에 대한 남녀노동자의 동등보수에 관한 협약(제100호) △고용 및 직업에 있어서 차별대우에 관한 협약(제111호) 4개만 비준했다.

반면에 87·98호 협약과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제29호), 강제노동 폐지에 관한 협약(제105호)은 비준하지 않고 있다. ILO에 따르면 이들 4개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회원국가는 한국을 비롯해 중국·브루나이·피지·몰디브·마셜제도·투발루 등 7개 나라밖에 없다.

전교조 법외노조화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87·98호 협약에 따르면 모든 노동자들은 노조를 설립하고 가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행정당국은 이를 제한할 수 없다. 특히 국내법령이 ILO 협약에서 규정한 권리를 침해할 수 없게 돼 있다. 해직자나 5급 이상 공무원 또는 소방관의 노조가입을 제한한 우리나라의 교원노조법과 공무원노조법은 협약 내용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 공익근무 제도로 비준 ‘좌초’

한국 정부가 비준을 미루는 핵심협약 중 강제노동과 관련한 29호 협약은 비준 가능성이 꾸준히 검토돼 왔다. 공개되지는 않고 있지만 고용노동부는 2011년 강제노동 관련 협약 비준 가능성에 대해 연구용역을 의뢰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노사정도 협약 비준을 논의했고, 2006년에는 비준을 추진하기도 했다.

29호 협약 비준과 관련한 핵심쟁점은 공익근무요원의 강제노동 여부다. 의무적인 군복무, 국가 비상시(전쟁·홍수 등) 노역 등은 ILO 협약에서 강제노동이 아닌 것으로 분류된다.

공익근무가 대체복무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강제노동 성격이 없다고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복무기간 중 군사적 목적을 위한 업무를 하지 않고, 공공업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강제노동 금지 협약을 위반할 개연성이 존재한다.

실제 한국 정부는 2006년 공익근무 제도와 관련해 병역법 개정 없이도 29호 협약 비준이 가능하다고 보고 비준을 추진했다가 곧바로 중단했다. ILO가 “공익근무 제도는 29호 협약에서 금지한 강제노동”이라는 해석을 내렸기 때문이다.

최기동 노동부 국제협력관은 “비공식적으로 ILO에 의뢰했을 때 강제노동이 아니라는 답을 들었는데 공문을 보내 자문을 구했을 때는 부정적인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제한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고용허가제법)도 병역법과 마찬가지로 강제노동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

강제노동 유지하는 독소조항들

강제노동 철폐에 관한 105호 협약은 더 큰 국내법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105호 협약은 △정치적 견해 또는 기존의 정치·사회·경제제도에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제재 △경제발전 목적 △노동규제 △파업참가에 대한 제재 △인종·민족·종교 차별대우를 목적으로 한 강제노동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형법상 징역제도는 강제노역을 수반하게 돼 있다. 2010년 형법 개정을 통해 노역을 하지 않는 금고형이 징역형과 합쳐지면서 강제노역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 공무원의 정치운동을 금지한 국가·지방공무원법, 국가보안법, 파업시 업무방해죄를 적용할 수 있는 형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등을 위반해 징역을 살게 되면 ILO 협약 105호를 정면으로 위반하게 된다. 협약에 저촉되는 관련법 조항은 우리나라의 정치·군사적인 상황, 노사관계 측면에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때문에 105호 협약 비준을 놓고 노사단체 간 의견이 엇갈린다. 노동계는 “업무방해 관련 형법조항 등 평소 국제사회에서 개정을 권고한 독소적인 법조항들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본부 실장은 “징역시 강제노동을 하는 것도 문제인데, 파업을 했다가 구속되는 노동자들이 너무 많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반면에 경영계는 “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징역과 동시에 강제노동을 하게 돼 있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준희 한국경총 법제팀장은 “노역시 근로대가를 지불하는 등 징역제도 개선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ILO·OECD·EU에 한 약속은 ‘휴지 조각’

강제노동 금지와 철폐를 담은 29호·105호 협약은 그나마 실제 비준이 추진되거나 노사정 간 논의가 이뤄졌다. 이에 반해 결사의 자유와 단체협약에 관한 87·98호 협약 비준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미약하기 짝이 없다.

노사정 간 제대로 된 논의가 없을뿐더러 계속되는 국제사회의 협약비준 권고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92년 ILO에 가입한 뒤 올해까지 결사의 자유나 단결권과 관련해 받은 권고는 29차례나 된다. 22년 동안 매년 1.3회의 권고를 받은 셈이다.

한국 정부가 ILO에 가입한 것은 그 자체가 협약을 비준하겠다는 뜻이었다. 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되면서도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했다. 비준 이행을 전제로 △제3자 개입 금지 조항 폐지 △전교조 합법화 △공무원의 결사의 자유 인정 △복수노조 허용 △전임자임금 노사자율 결정 △필수공익사업장 제도 폐지 △해고자 및 실업자의 조합원 자격에 대한 노조의 자율성 인정 △형법상 업무방해 혐의로 인한 노동자 구속 방지 등의 법·제도 개선과 관련해 OECD의 모니터링을 받았다.

그 결과 제대로 이행된 것은 제3자 개입금지 조항 폐지밖에 없다. 복수노조 허용과 필수공익사업장 제도 폐지는 일부 개선에 그쳤다. 최근에는 공무원노조와 전교조의 법외노조화로 과거로 회귀했다는 비판마저 나온다.

올해 9월 한국에서 열린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시민사회포럼 노동 분야 워크숍에서는 한국 정부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국제노동계의 지적이 잇따랐다. 한-EU FTA 협정문 제13장에는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뿐만 아니라 국제노동기구에 의해 현행 협약으로 분류된 그 밖의 협약들을 비준하기 위해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한다”고 명시돼 있다. 8개 핵심협약의 원칙에 대해서는 “존중·증진 및 실현하기로 약속한다”고 적혀 있다.

한국 정부가 한-EU FTA를 체결하면서 핵심협약을 비준하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이를 지키지 않아 국제사회에서 망신을 초래했다. 류미경 민주노총 국제국장은 “ILO와 OECD 가입, 한-EU FTA 체결 당시 한 약속을 통째로 지키지 않으면서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망신과 비난을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법부터 개정” vs “정부 의지가 중요”

ILO는 2015년까지 모든 회원국들이 8개 핵심협약을 비준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그럼에도 노동부의 움직임을 보면 남아 있는 4개 핵심협약 비준은 먼 나라 얘기다.

ILO 협약을 비준하려면 각국 정부는 비준서를 ILO에 기탁해야 한다. 그리고 1년 뒤에 해당국가에 협약이 발효되면서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게 된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비준하지 않고 있는 협약을 비준하려면 해고자의 노조가입을 금지하고 있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과 교원노조법·공무원노조법·병역법·형법·국가보안법·집시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에 대해 노동부는 "협약과 충돌하는 국내법의 경우 개정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비준을 추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협약 비준과 법 개정을 위해서는 외교부 협의와 법제처 심사, 국무회의·국회 통과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무턱대고 비준부터 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노동부는 연내에 국내법과 크게 저촉되지 않는 비준대상 협약을 선정할 방침이다. 그러나 4개 핵심협약 비준은 장기과제로 넘기겠다는 복안이다. 최기동 국제협력관은 “ILO 핵심협약 관련 국내 법조항 개정에 대해 사회적 입장차이가 너무 크다”며 “법 개정이 먼저 이뤄지거나, 적어도 법 개정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있어야 핵심협약 비준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재계도 비슷한 입장이다. 법 개정을 하지 않고 비준부터 하게 되면 ILO 기준적용위원회 의제로 채택되고, 제소와 이행감시가 반복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준희 경총 법제팀장은 “노동계의 잦은 ILO 제소 등으로 마치 우리나라가 노동후진국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노동부의 ‘선 법개정, 후 협약비준’ 입장에 대해 유독 노동 관련 법·제도 개선에만 인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효원 국제통합제조산별노련(인더스터리올) 컨설턴트는 “한미FTA를 추진할 때는 글로벌 수준에 맞춘다는 명목으로 사회적 합의 과정마저 무시한 채 밀어붙였던 한국 정부가 수십 년간 글로벌 노동기준이 된 ILO 핵심협약에 대해 사회적 합의 운운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했다.

이창근 민주노총 사회공공성본부 실장은 “비준을 먼저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비준절차와 법개정 절차를 동시에 진행하는 방법도 있다”며 “정부 의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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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협약비준 미루고, 비준협약 이행 더디고

한국 정부 고용차별 관련 협약 미이행으로 두 차례 권고받아


노동전문가들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는 것만큼이나 비준한 협약내용을 국내법에 잘 적용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한다. 한국 정부가 비준한 ILO 핵심협약은 △취업의 최저연령에 관한 협약(제138호) △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 철폐에 관한 협약(제182호) △동일가치 노동에 대한 남녀노동자의 동등보수에 관한 협약(제100호) △고용 및 직업에 있어서 차별대우에 관한 협약(제111호)이다.

하지만 100·111호 협약의 국내 적용상황을 살펴보면 협약 내용과 동떨어져 있다. 모든 노동자가 동일가치 노동에 대해 동일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100호 협약의 핵심내용이다. 한국 정부는 97년 12월 100호 협약을 비준했지만 해당 원칙이 국내법에 명문화돼 시행된 것은 10여년 뒤인 2007년 7월이었다. 현대자동차의 불법파견 논쟁을 비롯해 현실에서 각종 차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종·피부색·성별·종교·정치적 견해 등에 따른 고용차별을 금지하도록 한 111호 협약 이행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올해 6월 열린 ILO 총회에서 한국의 고용차별 상황은 ILO 산하 상설기구인 기준적용위원회 정식 안건으로 상정될 정도였다. 각국 정부의 협약이행 여부를 점검하는 기준적용위는 “협약 111호 이행을 위해 ILO의 기술적 지원을 이용하고, 회의에서 나온 각국 노사정 대표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을 포함해 협약이행 현황을 재차 보고하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111호 협약 이행 정도가 미흡하다는 뜻이다. 기준적용위가 주요하게 지적한 것은 “정치적 견해에 따른 유치원 및 초중등 교원에 대한 차별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정당 후원이나 시국선언 등으로 전교조 조합원들이 해고된 것을 감안한 권고다.

그런 가운데 한국 정부가 스스로 비준한 111호 협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파면·해임된 해고자들이 노조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관련 노조에 '노조 아님'을 통보하거나 설립신고를 반려하는 일이 최근 잇따라 발생했다. 핵심협약 비준을 미루는 것은 물론이고 비준한 협약도 국내법을 이유로 이행하지 않는 모습을 동시에 연출한 셈이다.

한국 정부는 2009년에도 ILO 기준적용위로부터 111호 협약과 관련해 “고용형태에 따른 차별해소를 위한 법적 보호장치를 강화하고, 이주노동자 사업장 이동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을 유연화하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는 “정부의 협약 비준 여부는 좋은 일자리를 위한 중요한 지표가 되기는 하지만 비준 자체가 협약이행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며 “노사정 3자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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