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훈 기자
비정규직법이 시행된 2007년 7월 초 우리은행 종로지점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이상수 당시 노동부 장관과 우리은행장, 금융노조 우리은행지부 위원장이 환하게 웃으며 ‘축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이라고 적힌 떡 케이크를 잘랐다.

이 전 장관이 비정규직법 시행을 알리는 장소로 우리은행을 택한 이유는 홍보효과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비정규직법이 시행되기 전인 같은해 3월 은행창구와 콜센터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3천76명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다. 2년이 지난 기간제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내용의 비정규직법이 현장에서 모범적으로 적용되는 모습을 우리은행이 보여 준 것이다.
 
 
 
 

6년간 3만명 이상 무기계약직으로 전환

우리은행을 필두로 그해 7월부터 은행권에 무기계약직 전환 바람이 불었다. 이랜드 사태를 비롯해 비정규직법 제·개정 논란의 와중에 비정규직 대량해고로 전국이 몸살을 앓았던 터라 이 전 장관에게 은행권은 구세주나 다름없었으리라. 실제로 금융노조가 산하 지부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09년 6월까지 18개 은행에서 3만8천명의 비정규직 중 2만679명이 무기계약직이나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2008년에만 무기계약직 전환자가 8천571명에 이르렀다.

이명박 정부 들어 비정규직법 개정 논란이 일면서 잠시 열기가 시들해졌지만 비슷한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은행권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비정규직은 2천10명이나 된다.

특히 금융 노사는 지난해 단체교섭에서 기간제 사용기간을 2년에서 1년으로 단축하는 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올 들어 3월까지 2천623명의 비정규직이 무기계약직이 됐다.<표 참조>

남은 비정규직이 7천명이 안 되는 것을 감안하면 비정규직법 시행 이후 적어도 3만명 이상의 비정규직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것이다. 덕분에 30%에 육박했던 은행권의 비정규직 비율은 지난해 8%로 하락했다. 올해 3월에는 5.8%로 떨어졌다.

금융권에 따르면 전체 직원 가운데 비정규직 비중은 하나은행(12.01%)과 경남은행(10.88%)·SC은행(9.36%)·NH농협은행(9.14%)이 높고, KB국민은행(0.81%)·우리은행(1.38%)·광주은행(1.55%)이 낮다. 물론 비정규직 비중이 아무리 높은 은행이라도 전 산업 평균을 한참 밑돈다. 최근 발표된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으로 비정규직 비중은 32.3%다.

'구조조정 정규직' 빈자리 채워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에 포함할 경우 은행권 정규직 규모는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은행권 정규직은 외환위기 이후 통폐합 등 구조조정으로 급격하게 감소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97년 말(32개 은행) 정규직 13만6천450명, 비정규직 1만6천528명이던 인원은 2003년 말(19개 은행) 정규직 8만9천203명, 비정규직 3만6천633명으로 바뀌었다. 2007년 말(18개 은행)에는 정규직 9만6천213명, 비정규직 3만8천731명이 됐다.

이후 은행수는 변동이 없는 상황에서 정규직이 급증했다. 지난해 말 은행권 정규직은 11만5천157명, 비정규직은 1만1천843명을 기록했다. 올해 3월에는 정규직이 11만5천971명으로 늘고 비정규직은 6천857명으로 줄었다.

정규직 구조조정에 따른 빈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웠다가 비정규직법 시행 이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한 것으로 풀이된다. 우리은행이 대표적이다. 무기계약직 전환 직전이던 2006년 12월 1만4천135명이던 우리은행 직원 규모는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에도 큰 변동이 없었다. 우리은행 직원은 2007년 3월 1만4천294명, 2008년 3월 1만4천825명, 2009년 3월 1만5천27명, 2010년 3월 1만4천924명, 2011년 3월 1만5천90명, 지난해 3월 1만5천234명으로 집계됐다.

우리은행은 3천76명의 비정규직을 일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할 당시 개인금융서비스직군을 신설해 1천981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비정규직을 사무행원이나 CS직군(콜센터)에 넣었다. 올해 8월 말 현재 개인금융서비스직군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2천999명이다. 5년 새 늘어난 우리은행 전체 직원수와 비슷하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개인금융서비스직군의 급여는 기존 정규직보다 조금 적지만 복지는 같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급여가 적은 별도직군을 중심으로 직원을 늘렸다는 얘기다.

"무기계약직으로 부르지 말라"는 은행

은행별로 채택한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 방식은 다양하다. 우리은행의 개인금융서비스직군처럼 별도직군을 설치해 전환한 곳이 있는가 하면 정규직 최하위 직급(6급) 아래 직급(7급)을 만들어 배치하기도 한다. 급여도 일반정규직처럼 호봉제를 적용하는 곳이 있는 반면 별도직군에만 연봉제를 적용하는 은행도 있다.

신한은행은 올해 1월 RS직군을 신설했다. 주임텔러와 선임텔러를 거쳐 수석텔러가 되면 일반정규직(4급) 전환시험을 치를 자격이 주어진다. IBK기업은행은 무기계약직을 '준정규직'으로 통칭한다.

별도직군에 배치된 무기계약직은 할 수 있는 직무가 제한된다. 이를테면 수신업무는 일반정규직처럼 할 수 있지만 심사가 필요한 여신업무는 할 수 없다. 신입직원들이 입사시험을 치를 때 무기계약직에 참여할 기회를 주는 은행도 있다. 이른바 ‘정규직 전환고시’다. 신한·SC·하나·국민·기업·씨티은행이 이런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경남은행과 대구은행은 일반정규직(1~6급) 아래에 7급을 신설한 케이스다. 외환은행은 무기계약직 텔러를 ‘로즈텔러’라고 부른다.

은행은 무기계약직이라는 단어 자체를 금기시한다. 최근 금융노조와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가 벌인 임금교섭에서 무기계약직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노조가 무기계약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을 정규직 임금인상률의 두 배로 하자고 요구했는데, 사용자협의회는 "무기계약직은 정규직"이라며 노조의 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달 24일 타결된 임금협약에도 무기계약직이라는 용어 대신 “임금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직군”이라는 표현이 들어갔다.

사용자협의회는 은행에 ‘용어선택 주의’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용자협의회는 “은행 텔러인 무기계약직은 이미 정규직이므로 정규직 전환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며 “각 은행별로 용어 사용을 신중히 해서 무기계약직이 비정규직으로 오해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은행들은 그러나 단체협약을 적용할 때는 무기계약직을 제외한다. 한 은행지부 관계자는 “은행측이 단협 적용대상을 정규직으로 제한하고, 무기계약직은 적용받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기계약직까지 단협을 적용하면 비용부담이 커진다는 이유에서다. 무기계약직이 임금교섭을 할 때는 정규직이고, 단협을 적용할 때는 정규직이 아니라는 희한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행원제도 부활?

무기계약직을 여행원제도의 부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여행원제도는 여성을 창구업무 등 단순업무에 배치한 뒤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주면서 승진을 제한한 제도를 말한다. 91년 노동부가 남녀고용평등법을 근거로 은행권에 시정조치를 내렸고, 95년 폐지됐다.

은행권에서 시행하는 직군제가 여행원제도와 흡사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실제 2005년에는 직군제를 시행한 하나은행의 노동자들이 "성차별적 인사제도"라며 경영진을 검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금융노조 관계자는 “당시 문제가 되자 은행측은 여성만 있는 직군에 남성을 배치해 물타기를 했다”고 증언했다. <매일노동뉴스>가 만난 무기계약직들은 “여행원제도에서 남성이 하는 여신업무를 하고 승진하려면 일명 ‘성전환고시’를 보던 때와 무기계약직이 일반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위해 ‘정규직 전환고시’를 보는 것이 뭐가 다르냐”고 반문했다.<상자기사 참조>

그도 그럴 것이 2009년 노조 조사에 따르면 무기계약직 1만3천여명 중 여성이 1만1천963명으로 90%를 웃돈다. 여성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 비중이 높았던 우리은행을 비롯한 일부 은행지부가 “무기계약직이 없다”고 답한 것을 감안하면 무기계약직 여성 비중은 더욱 상승할 공산이 크다.

4년 전 외국계은행에 입사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는 배영현(29·가명)씨는 “복지는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급여는 달라지지 않았다”며 “정년만 보장받았다고 보면 된다”고 잘라 말했다. 배씨는 “은행 창구에서 정규직과 거의 같은 일을 한다”며 “무기계약직 전환제도는 월급은 적게 주고 일은 똑같이 시키려고 만든 제도”라고 비판했다.
 

무기계약직, 그녀들의 수다
"정규직 전환방법 묻는 무기계약직 보면 안쓰럽다"

지난 25일 <매일노동뉴스>가 점심시간에 맞춰 서울 명동의 한 식당에서 두 명의 무기계약 노동자를 만났다. 이날 만남은 이름과 직장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성사됐다. 88년 A은행에 입사해 둘째를 낳고 그만뒀다가 99년 A은행에 기간제로 재입사한 ㄱ(44)씨, 외환위기 직전 B은행에서 일하다 육아를 위해 그만두고 기간제로 재입사한 ㄴ(38)씨다. ㄱ씨와 ㄴ씨 모두 2007년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다. 경력단절을 겪은 뒤 비정규직으로 은행에 다시 돌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ㄱ씨 : 88년 입사해 다른 은행까지 7년 정도 일을 하다가 둘째 낳고 그만뒀다. 다시 입사한 지는 14년 됐다. 비정규직이 막 생길 때부터 지금까지 왔다. 비정규직을 거쳤으니까 비정규직이라는 것을 알지, 2007년 이후 직군제로 들어온 친구들은 아마 자신을 정규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ㄴ씨 : 2007년 비정규직법이 시행될 때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다. 은행에 무기계약직이라는 말은 없다. 다르게 표현한다. 복지는 정규직과 다른 게 없다. 급여는 정규직의 70%다. 일도 70%만 한다. 업무 부담이 크지 않고 한 만큼만 받으니까 정규직을 원치 않는 직원도 있다.

ㄱ씨 : 어떻게 70%만 일하나.

ㄴ씨 : 심사가 필요한 여신업무는 하지 않는다. 담보나 신용대출은 평가가 필요하니까. 회사에서도 그만큼 못해야 차별할 근거가 생기지 않겠나. 일반적으로 예금을 받는다든지, 방카(방카슈랑스 상품)를 판다든지 하는 일은 다 똑같다. 예전에는 정규직, 비정규직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누구든 회사에 취직하면 정규직이었다. 97년 입사했는데 비정규직이 없었다. 똑같이 들어가서 여행원, 남행원으로 나뉘지도 않았다. 같은 기수였을 뿐이다.

결혼하고 애기 낳고 유치원 다닐 때쯤 다시 일을 하고 싶어서 들어왔다. 30대 중반에 누가 뽑아 주겠나. 나 같은 아줌마를. 행운이지. 그러니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겠나. 근데 주위를 보면 일은 안 하는데 월급은 더 많이 받는 직원이 있다. 옛날에 했던 일이 생각났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었다. 자격증도 땄는데. 더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거나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데도 배제된 것이다. 그 업무는 내가 훨씬 잘할 수 있는데.

ㄱ씨 : 능력이 되고, 잠재력도 있는데 직군에 묶여 일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장기적인 측면에서 국가나 은행에 마이너스가. 돈 좀 아끼려다가 일할 사람들을 버리는 것이다.

ㄴ씨 : 무기계약직 일을 늘려 달라고 해도 은행측은 어렵다고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때문이란다. 여신업무까지 하면 정규직과 비교해 하는 일이 똑같아지고, 그러면 급여도 더 줘야 하니까.

ㄱ씨 : 시중은행에서 기간제로 일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1년6개월이 되자 계약해지됐다. 6개월 뒤에 다시 부르겠다면서. 2년이면 무기계약으로 전환해야 하니까 그런 편법을 쓴다. 그래도 친구는 좋아한다. 급여도 어느 정도 되고, 퇴직금도 주니까. 은행이 차별을 참 똑똑하게 하는 거다.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느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

ㄴ씨 : 정규직 전환고시는 물론이고 현재 직군에 취업하려고 해도 경쟁률이 치열하다. 무기계약직이 없었으면 정규직이 됐을 텐데.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 무기계약직으로 들어와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면 어떤 게 필요한지 묻는 직원을 보면 안쓰럽다.

ㄱ씨 : 지금의 무기계약직 전환제도는 여행원제도와 똑같다. 예전에는 여성 행원이 남성 행원이 하는 일을 하려면 시험을 쳐야 했다. 우리는 ‘성전환고시’라고 불렀다. 전환고시가 승진시험보다 어려웠다. 은행측이 해 주기 싫은 거지. 여직원들은 남자 월급의 70%로 쓸 수 있는데, 업무를 전환해 주면 똑같이 줘야 하니까. 요새 7급직 만든 곳은 20호봉까지 있다고 한다. 20호봉을 다 채워야 다음 직급으로 넘어갈 수 있게 만든 거다. 일종의 꼼수다.

ㄴ씨 : 말은 정규직으로 전환했다고 하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 제도다. 계약직이 아닌데 월급은 계약직과 같다. 사람들 능력을 틀 안에 가둬 버린다. 요새 무기계약직이 그렇다.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든다. 이건 차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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