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대부분 나라의 노조 조직체계는 기업별노조가 주를 이루는데 그 상태가 가장 심한 나라가 태국이 아닐까 싶다. 태국 인구 전체 6천400만명 중 3천900만명 정도가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농업을 비롯한 비공식부문 종사자는 2천400만명이고 공식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1천400만명이다.

2013년 현재 태국의 노조수는 1천373개, 조합원수는 57만9천349명이다. 노조 1곳의 평균 조합원수는 422명이다. 작은 조합원수는 기업별노조체계의 전형적인 결과다. 조직 노동자 중 41만2천697명이 민간부문 1천328개 노조에 속해 있고, 16만6천652명이 공공부문 45개 노조에 속해 있다. 민간부문 노조의 평균 조합원수는 310명이고, 공공부문 노조는 3천703명이다. 공식부문을 대상으로 할 때 노조 조직률은 4%를 겨우 넘는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상급단체, 즉 노총과 산별연맹의 위상과 역할이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연맹이 20곳이고, 전국협의회(내셔널센터)가 13곳이다. 여기에 공공부문 총연맹 1곳이 따로 있다. 연맹과 내셔널센터는 별다른 연관 없이 따로 논다. 단위노조는 연맹에도 가입하고, 내셔널센터에도 가입한다. 또 지역별연맹이나 노조그룹에 가입한 경우도 많다. 문제는 전국중앙-산별연맹-지역조직이 체계적인 연계 없이 따로 논다는 점이다. 노조 조직체계가 엉망이다 보니, 단위노조의 일상활동을 점검하고 지원하는 등 상급단체의 역할과 기능이 별로 없다.

사무실도 상근자도 없는 연맹

상급단체의 자원과 역량을 살펴보면 심각한 수준이다. 사무실은 물론 상근자가 있는 연맹이 거의 없다. 연맹 지도부를 맡은 단위노조 간부가 자기 시간을 쪼개 연맹 산하 투쟁 사업장을 지원하는 식이다. 지역이나 산업 차원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원이나 연대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태국에서 가장 강력한 연맹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태국전자자동차금속연맹(TEAM)은 90개 단위노조에 조합원 6만명을 거느리고 있고 자기 사무실도 있다. 하지만 상근자는 채용직 2명과 위원장과 사무처장 등 4명뿐이다. 1년 예산은 240만바트, 우리 돈으로 8천200만원 정도다. 그런데 전체 예산에서 조합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0%도 안 된다. 해외노동단체의 지원액이 과반을 넘는다. 태국에서 가장 안정적이라는 연맹의 상태가 이 정도인 것을 감안할 때 상근자와 사무실조차 없는 다른 연맹들의 경우 그 활동의 양과 질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기업별노조라는 조직체계의 심각성에 더해 제대로 된 상급단체가 없는 현실은 태국 노동운동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잘 설명한다.

태국은 군주제 국가다. 태국의 왕실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왕실 중 하나다. 의회에서 법률이 통과되더라도 왕실의 최종 승인이 없으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법관의 임명도 최종적으로 왕실이 결정한다. 태국군의 통수권자도 왕이다.

공기업들은 대부분 왕실에 속한 기업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공공부문 노조들의 경우 왕당파 성향이 강하다.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정치적인 성향에 따른 상급단체의 분열과 더불어 왕실에 대한 태도가 무엇이냐에 따른 분열과 갈등도 태국 노동운동이 부딪히고 있는 문제다.

일부 민간부문 노조들은 왕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다. 사무실이 없고 상근자도 없는 상급단체들이 이해관계와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분오열돼 있는 조건에서 노동운동이 성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군주제로 대표되는 봉건 잔재는 의식과 문화에서 노사관계와 노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선 태국에는 ‘대화’라는 단어가 없다. 때문에 ‘사회적 대화’를 제대로 번역하거나 통역하지 못한다. 대화는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대화라는 말이 없다는 사실은 대등한 관계가 없음을 뜻한다. 그래서 노사관계, 다시 말해 사용자와 종업원의 관계는 언어 습관에서도 대등한 관계가 되지 못한다. 태국의 법률용어로 사용자는 '고용한 주인'이고, 종업원은 '고용된 아이'다. 그래서 태국어에서 노사관계는 '주인과 아이'의 관계로 표현된다. 이런 언어적 습관과 관행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현실의 노사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실제 태국에서 사용자, 특히 다국적기업의 사용자를 보면 왕처럼 행동하면서 종업원들을 종처럼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단체협약이 아닌 ‘노동조건협약’

이런 이유에서일까. 태국 노동법에는 단체협약이라는 말이 없다. 대신 '노동조건협약'이라는 말이 있다. 임금과 노동조건만이 교섭의 대상이고 노조활동의 자유는 교섭의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단위노조에서 상근자와 노조사무실, 그리고 유급노조활동을 찾아보기는 참으로 어렵다.

이토록 사정이 어려움에도 태국 노동운동은 꿈틀대고 있다. 정치적 차이를 극복하고 단결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공장과 기업을 넘어 지역과 산업에서 연대하려는 노력도 보인다. 국제노동기준에 반하는 노동법을 개정하려는 캠페인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산별노조의 지향을 갖고 상급단체를 강화하려는 흐름이 감지된다. 산별노조를 향한 발걸음에 분주한 한국 노동운동의 국제사업이 관심을 기울일 지점이 아닐까 싶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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