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114년간 국민의 발 노릇을 했던 공공철도가 위험하다. 지난해 대선을 전후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철도 민영화 논란은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쟁점으로 떠올랐다. 박근혜 정부는 취임하자마자 경쟁을 통한 효율성 강화와 재무건전성 제고를 명목으로 수서발 KTX 법인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사실상 철도 분할 민영화다.

철도 민영화 추진의 역사는 길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철도 민영화가 추진됐다. 철도노동자들의 투쟁과 여론의 뭇매를 맞고 주춤하다가도 여론이 잠잠해지면 다시 발톱을 드러낸다.

한국철도가 새로운 100년을 내다봐야 하는 지금, <매일노동뉴스>가 사회적 대화를 통한 발전방안을 기대하며 철도 민영화를 둘러싼 주요 쟁점과 논란을 3회에 걸쳐 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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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 순서]
① 돌고 돌아 다시 철도 민영화
② KTX 분할의 허구, 그리고 후폭풍
③ 바람직한 철도산업 구조개편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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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훈 기자

'언스토퍼블(2010·미국)'이란 액션영화가 있다. 통제불능 상태로 인구가 밀집한 도심을 향해 폭주하는 대형 화물열차 777호기를 멈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화다. 작업을 빨리 마치려는 정비공의 부주의로 폭발성 화물을 실은 무인열차 777호기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며 질주한다.

2013년 현재 우리는 영화도 아닌 현실에서 777호기처럼 폭주하는 기관차를 보고 있다. 일을 서두르다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정비공의 모습에 국토교통부의 확신에 찬 모습이 오버랩되는 건 왜일까.

국토부가 다급하게 추진하고 있는 '철도산업 발전방안'은 화물열차 777호기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정비공의 실수로 한순간 살상무기로 돌변한 777호기처럼 철도산업 발전방안이 한국 철도산업에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노동·시민·사회·철도 전문가들이 '철도산업 발전방안' 시행을 중단한 뒤 사회적 합의지점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철도 상하분리, 평가는 했을까

철도노조나 시민사회, 전문가들은 한국 철도산업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철도공사(코레일)와 철도시설공단의 적자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만성적자와 부실의 늪에서 탈출하기 위한 동아줄이 반드시 개방과 경쟁밖에 없는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찍는다.

경쟁체제 도입을 주장하기에 앞서 이른바 '상하분리'라는 철도산업 구조개혁이 단행된 2004년부터 올해까지 철도정책에 대한 평가부터 해야 한다는 요구다. 그래야 처방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상하분리'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정부는 당시 철도청을 시설(철도시설공단)과 운영(철도공사)으로 분리했다. 정부는 철도공사의 어마어마한 부채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경쟁체제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이에 노동계는 부채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부채를 해소할 수 없는 구조가 더 문제라고 반박한다.

정부는 2004년 상하분리를 하면서 전체 고속철도 건설부채 18조4천억원 중 35%인 6조4천억원만 부담하고, 나머지 12조원의 부채를 철도공사(4조3천억원)와 철도시설공단(6조8천억원)에 승계시켰다. 철도공사의 목을 짓누르는 태생적인 부채다.

철도시설공단의 부채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철도시설에 대한 투자와 관리를 책임지겠다던 약속은 절반밖에 안 지켜지고 있다. 교통 사회간접자본(SOC) 전체 투자 중 절반 가까이가 도로에 투자됐다. 철도에 대한 투자는 도로의 절반반에 불과하다.

정부는 전체 고속철도 건설 사업비의 40~50%만 지원하고 있다. 철도시설공단은 채권을 발행해 부족한 건설비를 충당하는 실정이다. 공단의 부채는 지난해 17조3천400억원까지 불어났다. 하루 이자만 23억원에 달한다.

공단은 재정부담을 철도공사 선로사용료로 전가했다. 당연히 철도공사는 과다한 선로사용료 부담에 허덕인다.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철도시설에 대한 국가의 투자책임을 명확히 해서 철도 운영자가 철도건설과 유지보수 비용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도록 하겠다는 철도 상하분리의 취지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가 상하통합으로 돌아간 이유

냉정하게 분석하면 철도 상하분리로 늘어난 건 안전사고와 두 기관 간 갈등뿐이다. 철도노조는 "상하분리가 되면서 열차운행선 건설과 개량 공사시 안전조치가 무시되고 있고, 열차안전운행 확보를 위한 협의체계의 복잡·불이행·소통부재가 빈번하다"고 지적했다. 경의선 가좌역 노반붕괴 사고(2007년)와 서울~신촌역 간 타워크레인 전도사고(2009년)는 철도공사와 철도시설공단의 유기적 협력체계가 작동되지 않아 발생한 대표적 사고로 꼽힌다.

철도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불편함도 여기에 있다. 이달 14일 오후 청량리전기사업소에서 만난 장태준(38·가명)씨는 "공사와 공단이 소통은 소통대로 못하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소재를 따지느라 바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장씨는 "공단이 역사를 짓고 난 뒤 우리가 유지·보수를 하기 위해 역내설계도면을 달라고 하면 자기들은 모른다고 한다. 짓고 나면 끝인 거다"며 "한 회사였다면 그렇게 했겠냐"고 반문했다.

결국 상하분리는 시행 9년 만에 철도에 대한 국가책임을 명확히 한다는 장점은 사라진 채 두 기관 부채의 원인이자 분할 민영화의 상징으로만 남은 것이다.

우리나라가 상하분리의 롤모델로 삼았던 프랑스는 상하분리 이후 부채 급증과 열차 서비스 질 저하를 이유로 상하통합으로 회귀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해 10월 "철도 운영과 시설을 통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영수 공공운수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프랑스 같은 철도강국이 상하분리에서 다시 상하통합을 하겠다는 것은 그게 더 효율적이라는 이야기"라며 "우리나라도 상하분리 정책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철도 지배구조 개혁이 먼저"

철도노조는 "경쟁체제 도입이 아니라 지배구조 개선을 논의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실제 영국의 민간 철도시설 관리회사인 레일트랙(Railtrack)은 공적 소유의 비영리법인인 네트워크 레일(Network Rail)로 넘어갔고, 프랑스는 앞서 밝힌 대로 상하통합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노조는 이 같은 해외사례를 교훈 삼아 최고의 효율성을 발휘하면서도 사회적 기능을 다할 수 있는 지배구조를 마련한 다음 경쟁체제 도입을 논의해도 늦지 않다는 입장이다.

김영훈 노조 지도위원은 "자연독점일 수밖에 없는 국가 기간산업을 시장에 맡기면 자본독점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다수 시민들이 이용하는 공공재는 사회적·민중적 통제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철도정책 결정구조가 국토부 관료 위주로 짜여지면서 장기적인 정책보다는 정권 성향에 따라 근시안적으로 변동되는 경향이 짙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영수 연구위원은 “국토부가 철도전문 정책역량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고 있다”며 “그래서인지 '재정이 부실하니까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식의 정책이 나오는 것 같다”이라고 말했다.

철도산업에 정부·시민·노조가 참여하는 지배구조나 사회적 통제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프랑스와 독일을 예로 든다. 프랑스는 2011년 미래의 프랑스 철도모델에 관한 국가적 토론을 진행하기 위해 기업·노조·전문가·여객·수송조직기관·국회의원이 참여하는 철도총회를 개최했다. 5회에 걸친 전체회의와 60회 이상의 실무회의, 130회 이상의 청문회를 실시한 끝에 프랑스는 철도 상하통합을 결정했다.

독일철도 지주회사인 DB는 산하에 감독이사회와 집행이사회를 두고 있다. 감독이사회는 DB사의 전략적 방향과 재정관리를 감독하는 12명의 비상임이사로 구성돼 있다. 종업원 대표로 선발된 구성원들과 정부의 이해를 대표하는 구성원들이 동수로 있는 감독이사회는 광범위한 이해를 대변한다.

김영훈 지도위원은 "정부는 독일식 지주회사 모델로 가겠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독일철도의 지배구조 사례를 말하지 않았다"며 "지금부터라도 독일 지주회사의 지배구조에 대한 연구와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전면전 치닫는 노정 … "사회적 논의 시작해야"

정부는 철도 경쟁체제 도입을 추진하면서 사회적인 합의를 구하는 과정은 밟지 않고 있다. 올해 6월 철도산업 발전방안을 발표하면서 '고(GO)'를 외친 뒤에는 앞만 보고 내달리는 모양새다.

윤순철 경실련 사무처장은 "그래도 이명박 정부는 정부와 민간이 각각 주최한 토론회 등 11번의 시민여론 수렴 과정을 거치긴 했다"며 "박근혜 정부는 고작 3번밖에 안 했다"고 꼬집었다.

국토부는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들이 요구하는 철도발전을 위한 노·사·민·정 논의기구 설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대신 7월 국토부와 코레일이 발족한 '철도공사의 지주회사 전환을 위한 합동 태스크포스(TF)'에 참여하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철도노조에 TF에 들어와서 의견을 내라고 했는데 들어오지 않고 있다"고 노조에 책임을 떠넘겼다.

철도를 둘러싼 국면은 노정 간 전면대결로 치닫고 있다. 김대중 정부부터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철도 민영화 정책을 입안할 때마다 투쟁으로 막아 냈던 철도노조는 이번에도 수서발 KTX 법인 설립 강행시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방침이다.

9월 초 수서발 KTX 법인 설립이 강행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외압 논란으로 코레일 사장 선임이 한 차례 불발되면서 당초 예상보다 법인 설립이 늦춰졌다. 추석연휴가 끝나면 이달 말께 코레일 사장이 결정되고, 다음달 초에 수서발 KTX 법인이 설립될 것으로 노조는 내다봤다.

민주노총과 공공운수노조·연맹은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면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철도산업 발전방안을 사실상 철도 민영화로 간주하고 있는 야당들도 정기국회와 국정감사에서 철도 민영화 문제를 주요 이슈로 삼을 예정이다.

현재 민주당 공공부문민영화저지대책특별위원회(위원장 설훈)·정의당 KTX민영화저지특별위원회(위원장 박원석)·통합진보당 철도민영화저지특별위원회(공동위원장 오병윤·정희성)가 구성된 상태다.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은 “4대강으로 인한 녹조라떼는 보를 무너뜨리면 해결이라도 되는데 비가역성이 큰 철도는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며 “노동계가 제기한 여러 문제점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과 평가 없이 계속 밀어붙인다면 결국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정부는 철도 민영화 추진을 여기에서 중단하고 다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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