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일은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미국이 사주한 군사쿠데타로 붕괴한 지 40주년 되는 날이다.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된 남미 최초의 좌파 대통령으로 유명한 아옌데는 1970년 11월4일에서 73년 9월11일까지 3년 남짓 집권했다. 피노체트가 이끈 군부는 미국대사관과 중앙정보부(CIA)의 지원 속에 군사쿠데타를 수행했다. 합법적으로 수립된 정부를 불법 쿠데타로 무너뜨리는 음모에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깊숙이 관여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핵심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이끈 헨리 키신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칠레 경제에 대한 사보타주와 CIA의 비밀작전을 막후에서 지휘했다. 당시 미 백악관은 아옌데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었고, 칠레는 물론 남미에서 미국의 이익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으로 규정했다.

아옌데 정부 쓰러뜨린 트럭운전사 총파업

아옌데 정부는 소수의 수중에 집중된 경제적 부를 다수를 위해 분배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이를 위해 초국적자본이 지배하던 주요 산업을 규제하고, 토지개혁 등 생산시스템을 개혁하려 했다. 대표적인 예가 은행 국유화였다. 이를 통해 일하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채우려 했다. 아옌데의 프로그램은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국가로 집중시키고 노동자와 빈민들에게 재화를 나눠 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아옌데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미국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칠레를 고립시키는 외교정책을 가동했고, 칠레 경제를 붕괴시키고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작전에 돌입했다. 그 목표는 아옌데 정부의 타도였다. 당시 칠레 경제의 외국자본 의존도는 극심했다. 기계류 50%·철강금속 60%·석유생산판매 50%·화학제품 60%·고무생산 45%·자동차생산 100%·제약산업 100%·담배산업 100%·광고시장 90%를 외국자본이 차지했다. 칠레의 최대 외화벌이 수단이었던 구리 생산도 미국이 80%를 장악하고 있었다.

외환부채도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71년 말 칠레의 총 외채규모는 29억6천만달러였는데, 그중 13억5천만달러가 미국에서 빌린 돈이었다.

미국은 칠레의 심각한 경제종속 상황을 아옌데 정부 전복에 활용했다. 미국 자본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것이 전복작전의 중요 목표로 설정됐다. 60년대 칠레는 미국 원조프로그램의 최대 수혜국이었다. 하지만 아옌데 정부가 출범한 후 원조액은 대폭 삭감됐다. 세계은행의 외환대부도 71년 2천800만달러에서 73년 630만달러로 깎였다. 67년 2억3천400만달러에 달했던 수출입은행을 통한 신용거래가 71년에는 한 푼도 이뤄지지 않았다. 경제적 압박으로 칠레 사회를 혼란에 빠트린 미국은 73년 9월11일 군부의 쿠데타를 최종 승인함으로써 칠레 민주주의의 숨통을 끊었다. 쿠데타와 군사정부하에서 3만명이 살해당했다.

아옌데 정부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 분수령은 72년 10월과 11월에 조직된 트럭운전사들의 파업이었다. 칠레 경제가 완전히 멈춰 섰기 때문이다. CIA는 우익언론을 지원하고, 야당조직에 자금을 댔다. 무엇보다 우익반공단체들의 폭력행위를 조장했다. 택시운전사·트럭운전사·버스운전사·변호사·의사·상점주·항공기조종사·기술자·농부들이 파업에 돌입했는데 그 자금을 CIA가 직간접으로 댔다.

72년과 73년 사이 반정부파업을 위해 CIA가 동원한 자금 규모는 800만달러에 달했다. 이 가운데 상당액이 트럭운전사들의 전국총파업에 사용됐다. 반정부 파업을 촉발시키는 데는 미국노총(AFL-CIO)이 남미노동운동과의 ‘국제연대’를 위해 만든 미국자유노동발전기구(AIFLD)가 한몫했다. AIFLD는 칠레 노동자를 위한 정치교육을 진행했다. 69년까지 6천여명이, 72년까지 2천800여명이 이 교육을 받았다. 100여명은 고급과정을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교육내용은 아옌데 정부를 지지한 노동자총동맹(CUT)에 반대하는 것이 주를 이뤘다. AIFLD는 일반노동자가 아닌 교육수준이 높은 중산층을 상대로 활동을 펼쳤다. AIFLD의 지원을 가장 많이 받은 노조는 해상노조였다. 해상노조는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에 노조간부 가운데 처형할 사람과 수감할 사람, 해고할 사람을 정리한 리스트를 전해 줬다.

미국노총, 칠레 군사독재의 조력자

칠레트럭소유자총연맹이 조직한 트럭운전사(소유자) 총파업은 미국 노동단체와 연관을 맺은 자유주의 그룹과 전문직종사자들이 반정부 투쟁에 나서는 도화선이 됐다. 트럭소유자총연맹은 산하에 169개 노조를 두고 5만2천대의 트럭을 통제하고 있었다. AIFLD는 칠레전문직종사자총연맹 결성을 막후에서 지원하기도 했다. AIFLD가 CIA에서 받아 쓴 돈은 정확한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미국 국제원조국에서 직접 받아 집행한 예산은 72년 12만5천달러, 73년 11만8천달러에 달했다. 미국노총도 직간접으로 연루된 쿠데타 이후 칠레의 군사정부는 노동운동을 분쇄하고, 수천명의 노동운동가를 살해했다. 그리고 칠레의 산업을 원래 주인이었던 미국자본가에게 돌려줬다.

미국노총은 ‘국제연대’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미국노동센터(AALC)를 운영했다. 아시아에서는 아시아미국자유노동기구(AAFLI), 남유럽에서는 자유노조기구(FTUI)를 운영했다. AFFLI는 군사독재 시절 서울에도 사무소를 운영했다. 대륙별로 쪼개져 운영되던 조직들은 지금 미국국제노동연대센터(ACILS)로 통합됐다. ACILS는 지금도 미국노총의 '국제연대'를 지원하고 있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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