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말 금속·화학·에너지·광산·섬유 등 제조업노조들의 국제상급단체인 인더스트리올 회의가 필리핀에서 열렸다. 회의 목적은 지난해 6월 출범한 신생 조직인 인더스트리올에 속한 필리핀 가맹조직들의 단결과 연대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1990년대 초반 이후 분열과 쇠락의 연속이었던 필리핀 노동운동의 오늘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0개 노총과 130개가 넘는 연맹

인더스트리올의 필리핀 가맹조직은 17개다. 이번 회의에는 14개 조직에서 참석했다. 필리핀의 노조는 기업별노조가 대세로 인더스트리올 가맹조직은 모두 산별노조가 아닌 산별연맹이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연맹 앞에 ‘산별’이라고 붙이는 것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연맹들이 산업별로 조직대상을 획정하지 않고, 산업이나 업종을 가리지 않고 기업별노조의 가입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별 구획이라는 정치적 조정과 조직적 계획 속에 산별연맹이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적 성격에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기업별노조를 연맹으로 끌어들이는 조직화 관행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필리핀 가맹조직들은 산업별 특성을 갖지 못하고, 일반노조연맹의 성격을 띤다. 이러한 조직 특성은 연맹들의 이름에서 잘 드러난다. 예를 들면 필리핀자유노동조합연맹(PAFLU)·전노동자노동조합동맹(AWATU)·통합노동기구(ILO)·필리핀노동자조합(UFW)·노동조합연합(ALU) 따위다. 조직대상에 대한 산업별 획정의 부재와 조직적 무질서는 같은 노총에 속했다고 예외는 아니다. 내셔널센터가 같은데도 조직대상이 겹치는 경우가 많다. 노총이 조정과 지도 역할을 상실한 것이다.

2011년 기준으로 필리핀에는 10개 노총과 130개가 넘는 연맹이 활동하고 있다. 기업별노조는 1만6천385개다. 2010년 현재 조합원수는 171만4천명이다. 노총에 속하지 않은 연맹도 많고, 연맹에 속하지 않은 순수한 의미의 기업별노조도 많다. 인더스트리올 회의에 참가한 14개 연맹 중 3개가 무소속이었고, 나머지 9개 연맹은 5개 노총에 속해 있었다.

86년 민중혁명 이후 90년대를 거치면서 필리핀 노동운동은 성장을 거듭했다. 90년 305만명이었던 조합원수는 2000년 378만명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필리핀 노동운동은 급격한 쇠락을 경험한다. 조합원수는 2005년 191만명으로 급감했고, 2010년에는 171만명으로 떨어졌다. 2000년을 전후한 양적 팽창과 쇠락도 충격적이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90년대를 관통하는 양적 성장과 달리 질적인 측면에서 필리핀 노동운동이 처음부터 정체를 거듭해 왔다는 점이다.

질적 발전의 정체를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예가 단체협약을 적용받는 노동자수다. 조합원수가 300만명을 넘었던 90년에도 단체협약 적용 노동자수는 49만7천명에 불과했다. 조합원수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2000년에는 48만4천명으로 더 떨어졌다. 결국 2011년에는 21만2천명으로 내려앉았다.

조합원수가 늘어남에도, 오히려 조직노동자에 대한 단체협약 적용률이 떨어진 역설적 상황은 21세기 들어 조합원수가 급감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단체협약으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이익을 개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조합원으로 남을 이유가 없고, 노조에 새로 가입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단체협약 적용률이 낮은 이유는 정부의 반노동정책과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 등 다양한 이유를 외부에서 찾을 수 있겠으나, 노동운동 자체의 분열과 무능력이라는 내부 이유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노동전선 통일의 중요성

노동운동이 튼실하기 위해서는 노동전선의 통일이 중요하다. 이는 “1국-1노총, 1산업-1노조, 1기업-1노조” 원칙의 실천을 뜻한다. 분열의 이유가 무엇이든 노총이 10개가 넘을 때, 연맹수가 130개가 넘을 때 노동운동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총 산하 가맹조직의 산업별 구획과 조정도 중요한 문제다. 노총이 같은데도 산하 연맹들이 조직화 경쟁을 무질서하게 벌인다면, 그런 노동운동도 별로 기대할 게 없을 것이다. 단체협약을 비롯한 일상활동도 대단히 중요하다. 노동조합이 있지만 조합원들에게 양질의 단체협약을 제공할 수 없다면 그런 노동운동은 별로 기대할 게 없을 것이다. 필리핀 노동운동의 전철을 한국 노동운동은 되풀이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분열과 쇠락의 노동운동을 접하며 한국 노동운동이 얻어야 할 교훈을 생각해 본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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