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일 현대자동차 용역 경비원 등이 정몽구 회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공장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희망버스 참가자에게 소화분말과 물을 뿌리며 막고 있다. 카메라를 든 한 취재기자가 이를 피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우리가 또다시 포기하면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동지들의 목숨을 또 내놓으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본의 폭력과 불법에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수 있게 함께해 주십시오."

21일 새벽 2시. 현대차 울산공장 인근 철탑농성장 위에서 들려오는 최병승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최씨가 철탑 앞에 모인 시민들에게 물었다.

"지난 10년간 투쟁하면서 동지들의 피값을 보상받을 수 없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왜 죄 없는 노동자가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까. 왜 우리 스스로가 무기력과 야만적 폭력 앞에 주저해야 하는 겁니까."

떨리는 목소리에 울분이 묻어 나왔다. 이날은 현대차 사내하청 해고자 최병승·천의봉씨가 철탑에 오른 지 277일이 되는 날이다. 22일이면 대법원이 현대차 사내하청 불법파견 판결을 내린 지 3년이 된다. 그런 가운데 올 들어 현대차 불법파견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현대차 비정규직 2명·기아차 비정규직 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씨는 "동지를 죽인 것은 우리가 아니라 불법을 자행한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라며 "현대차 자본의 야만적 폭력에 주저앉지 않도록 함께해 달라"고 호소했다. 최병승·천의봉씨를 만나기 위해 모인 희망버스 시민 3천여명은 "함께하겠다"고 화답했다.

천의봉씨는 이날 건강상 문제로 발언을 하지 못했다. 희망버스 시민들에게 보낼 손편지를 쓰고 선글라스까지 준비했던 천씨였지만 20일 밤 희망버스 시민들과 현대차 간 격렬한 대치현장을 보며 말을 잃었다고 했다. 최병승씨는 "천의봉 동지가 가슴통증을 호소해 말을 하기 힘든 상태"라고 전했다.

▲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최병승ㆍ천의봉씨가 농성 중인 철탑 아래에 모여있다. 정기훈 기자

컨테이너에 막힌 '을'의 행렬

20일 밤 현대차 울산공장 주변에 일본 오사카 비정규직노조 조합원·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투쟁 할배·밀양 송전탑 반대투쟁 할매·장애인·용산철거민·진주의료원 노동자·청소노동자 등 전국의 '을'들이 모였다. 시민·노동자 3천여명은 현대차에 대법원 판결 이행을 촉구하기 위해 버스 63대·열차 1량·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열차를 몰며 현대차 울산공장 인근을 지나가던 철도 기관사들도 경적을 울리며 ‘빵빵연대’를 표했다.

하지만 현대차 정문에 모이려던 희망버스 기획단의 애초 계획은 무산됐다. 고엽제전우회 울산회원을 비롯한 보수단체들은 현대차 정문에서 희망버스 진입을 막기 위해 '희망버스 반대집회'를 열었다. 이에 앞서 현대차는 지난 19일 컨테이너 박스 20여개를 울산공장 정문 앞에 쌓아 두고 정문 좌우로 펼쳐진 담장에 패널을 덧붙였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보수단체와의 충돌을 막기 위해 정문 인근 효문사거리로 집결했다. 이들은 고 박정식 금속노조 현대차아산사내하청지회 사무장 추모제를 시작으로 행사를 시작했다. 시민들은 "박정식 열사의 자살은 현대차 자본에 의한 타살"이라며 "대법원 판결에 따른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외쳤던 고인의 절절한 소원을 투쟁으로 쟁취하자"고 한목소리를 냈다.

▲ 지난 20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정문 모습. 대형 컨테이너 박스와 철제 펜스로 문을 막았다. 정기훈 기자

"10년간 참았다, 우리 공장 돌려 달라"

추모제를 마치자 현대차 관리직과 용역이 울산공장 인근 담장 안을 둘러쌌다. 철탑농성장으로 행진하는 와중에 현대차 비정규 노동자들이 공장 진입을 시도하면서 사측과 대치가 시작됐다. 사측은 헬멧·마스크·방패·곤봉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저녁 8시.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공장 담벽을 밧줄로 묶어 뜯어내려 하자 사측은 소화기와 살수차로 맞섰다. 이에 발맞춘 듯 경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현장은 금세 아수라장이 됐다. 소화기 분말과 살수차가 쏘아 대는 물대포 때문에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허공에서는 생수통과 돌멩이가 날아다녔다. 바닥에는 폭우가 온 듯 물이 흥건했다. 소화기 분말가루로 숨은 막혀 왔다.

규모를 헤아릴 수 없는 시위진압 경찰들이 살수차를 뿌리며 전진했고 시민과 노동자들은 철탑이 있는 주차장으로 밀렸다. 경찰이 9살 초등학생에게 물대포를 살포해 시민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폭력경찰 물러가라", "정몽구를 구속하라", "현대차는 법을 따르라"는 시민들의 외침은 "불법시위"라는 경찰의 경고방송과 물대포에 휩쓸려 갔다. 이 과정에서 100여명이 다치고 11명이 응급실로 실려갔다. 경찰에 연행된 7명은 다음날 풀려났다.

▲ 희망버스 반대 집회를 연 상이군경회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희망버스 참가자들의 행진을 지켜보고있다. 정기훈 기자

"99% 을의 연대만이 희망"

한상균 전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몽구산성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광화문 명박산성보다 높아지고 있다"며 "법을 농락하는 현대차가 불법시위를 운운해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집회 후 문화제가 이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을들이 무대에 올라 서러움을 토했다. 강동균 제주 강정마을 회장은 "7년을 매일 전쟁터 속에서 살고 있어 10년간 싸운 현대차 불법파견 투쟁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며 "현대차가 대한민국의 기강을 흔들지 않도록 99% 을들이 연대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시민 홍아무개(33)씨는 "현대차가 자본의 힘을 이용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농락하는 것에 참담함을 느꼈다"며 "비정규직도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 내고 다양한 방식의 연대를 고민하겠다"고 다짐했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연대를 다짐하는 사이 현대차는 경찰차로 차벽을 치고 무너진 담벼락을 임시 철제패널로 복구하고 있었다.

울산=김은성 기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