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
대표

운동권에서 한때 박정희 정권의 정치체제를 파쇼체제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한가 아닌가라는 이론 다툼이 있었다. 테러통치이기는 하지만 나치의 히틀러처럼 대중의 동의에 의거한 것이 아니므로 박정희 정권의 통치를 파시즘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출됐던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학문적으로 무엇이 올바르든 파쇼체제라고 규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파쇼정권 타도”를 외치며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웠고,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기꺼이 희생했다.

그런데 이렇게 군사독재 정권들이 파쇼통치를 하던 당시 그것을 뒷받침하던 두 기둥이 있었는데, 하나는 정치군부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정보기관이었다. 정치군부는 비상시에 계엄령과 위수령, 총칼로써 파쇼통치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크게 역할을 한 것이 국가정보기관이었다. 평상시에 국민의 생활을 구석구석까지 감시하면서 법에 의한 폭력이 아니라 초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며 국민을 처벌했다. 명분은 국가안보였다. 그것에 저촉되는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을 단속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간첩이 조작됐고 수많은 사람의 귀중한 인생이 파괴됐다.

그 기관은 이름이 미국의 중앙정보부(CIA)를 본떠 한국중앙정보부(KCIA·중정)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5·16 군사쿠데타의 2인자인 김종필 중령(현 박근혜 대통령의 형부)이 맡았다. 사람들은 이 기관을 “남산”이라 불렀다. 자리 잡고 있던 곳이 남산 자락이었기 때문이다. 남산은 공포의 대명사였다. 잡혀가면 빨갱이로 몰려 지하실에서 고문당하고, 감옥살이를 하고, 심하면 사형을 당하는 그런 곳이었다. 이 국가정보기관은 미국의 중앙정보부처럼 대외 정보와 공작을 하는 곳이 아니라 대내 정보와 공작까지 하는 곳으로 국내 활동이 오히려 주된 것이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장은 권력서열 2인자였다.

이 중앙정보부는 국민들에게 공포와 증오의 대명사였다. 민주화운동은 중앙정보부 해체를 주요한 요구로 내세웠다. ‘중정’에 대한 국민의 증오가 오죽 심했으면 5·17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가 그 이름을 국가안전기획부로 바꿨을까. 하지만 이렇게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기관의 역할과 성격이 바뀐 것은 없었다. 장소도 여전히 남산 자락이었고, 실무를 담당하는 인물들도 그대로였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신군부의 안기부를 중정과 똑같이 미워하고 해체를 원했다.

안기부는 김대중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드디어 수술대에 올려졌고, 이번에는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국정원은 남산 자락에서 쫓겨나 멀리 내곡동으로 옮겨졌다. 고문도 함부로 할 수 없게 됐고, 국내 정보공작도 많은 제약을 받았다. 정치인 사찰을 하고 도청을 하던 못된 버릇을 다 버리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한동안 권력의 자리가 국가정보기관으로부터 검찰로 넘어가는 듯했다.

바로 그 국정원이 세간의 초점이 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해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정치공작을 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댓글달기를 한 것은 코미디이지만, 그런 일을 담당하는 부서까지 있었다고 하니 선거 개입은 결코 댓글달기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케 한 중대 문제다. 국정원은 또 대통령 선거에서 반공·반북 이념공세를 펼치기 위해 불법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기록 문서를 유출시켰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데, 이 또한 선거의 정당성을 훼손한 중대 문제다. 그래서 올해 4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검찰의 조사를 받았고 국정원이 압수수색을 받았다. 국회 국정조사 의제에도 올라 있다.

더구나 국정원은 자신의 잘못을 덮고자 전격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언론에 공개했다. 당시 남재준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이런 정치적 행위를 정당화했다. 나아가 7월10일에는 성명을 통해 회의록 공개는 적법절차를 거쳤고 “국가를 위한 충정”에서 했다고 주장하면서 노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NLL을 포기했다는 유권해석까지 내놓았다.

사태가 이 지경으로 흘러가고 있는데도 박근혜 정권은 초연한 자세를 취하면서 국정원 개혁은 국정원이 자체적으로 해야 한다는 기묘한 처방을 내놓았다. 개혁의 대상을 개혁의 주체로 둔갑시킨 것이다. 게다가 청와대 지시대로 움직이는 여당 지도부는 국정원에 대한 국정조사를 피하고자 국회를 파행으로 몰아가고 있다. 국정원을 중앙정보부로 바꾸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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