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원
노동자운동
연구소 연구실장

재벌대기업과 유명인사들이 조세피난처에 세운 유령회사가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뉴스타파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의 자료를 분석해 245명의 한국인이 버진아일랜드·쿡아일랜드·홍콩 등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세웠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해외 유령회사들은 국내 회사와 부당거래를 통해 자본을 해외로 이전하거나, 국내에서 드러나지 않는 비자금을 조성할 목적으로 설립된다. 245명의 한국인들이 세웠다는 유령회사들도 비슷한 목적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해외 유령회사를 통한 탈세와 비자금 조성이 종종 극악한 노조탄압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구미 KEC다. KEC 경영진은 2010년 5월 여자기숙사에 깡패까지 난입시키며 금속노조 KEC지회를 와해시키려 했다.

KEC지회 조사에 따르면 당시 노조탄압은 겉으로는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로 인한 노사갈등을 내세웠지만 실제 배경은 KEC 경영진의 해외 유령회사를 이용한 불법경영이었다. KEC 경영진이 2009년부터 해외 유령회사를 통해 그룹 이익의 상당 부분을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노조와 마찰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KEC(옛 한국전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반도체 기업 중 하나다. 1969년 일본 도시바와 재일교포 곽태석씨가 회사를 설립해 74년 한국전자로 회사이름을 바꿨고, 2006년 인적분할을 통해 한국전자홀딩스와 KEC로 나뉘어졌다. 한국전자홀딩스는 KEC와 TSPS, 그리고 해외영업법인들의 지분을 소유한 지주회사이고, KEC는 생산의 중심이다. KEC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2009년까지 구미의 대표 중견 전자회사로 꽤 탄탄한 성장을 해 왔다.

그런데 이 회사는 2009년 말부터 매우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2009년을 기점으로 그룹의 계열사 구조가 바뀌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KEC에 핵심부품을 공급하던 두 계열사가 갑자기 홍콩 말리바(MALEEVA)라는 듣도 보도 못한 회사로 넘어간 것이다. KEC에 리드프레임을 납품했고, KEC 회장의 아들과 KEC의 일본법인이 53% 지분을 가지고 있던 티에스피(TSP)가 2009년 6월2일자로 홍콩 회사에 넘어갔고,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하던 티에스디(TSD) 역시 2009년 11월12일 홍콩 회사에 넘어갔다.

회사가 어려워져 계열사를 매각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KEC와 그 계열사들은 2008~2009년 세계 경제위기로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십수년간 꽤 많은 이익을 계속 냈고, 2010년 초에는 증권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자업체의 하나로 분류될 정도로 전망이 밝았다.

그럼 도대체 왜 갑자기 2009년 두 계열사는 홍콩 말리바라는 회사로 소유권이 넘어가게 된 걸까.

지난해 금속노조 KEC지회 간부들이 조합원 90여명의 정리해고와 관련한 일로 일본 계열사인 KEC 재팬을 방문했을 당시 재미난 사실 하나가 밝혀졌다. 일본 KEC 재팬과 같은 건물에 티에스 재팬(TS-Japan)이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이 회사가 KEC의 일본 부품 수입 및 대일본 수출과 관련한 업무 대부분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이 업무는 KEC 계열사인 KEC 재팬이 했다. 그런데 2009년 이후부터 계열사 대신 TS 재팬이라는 회사가 수출입 업무를 담당했다는 것이다. 지회가 확인한 바는 TS 재팬은 KEC 회장의 부인이 대표이사였고, 대주주는 홍콩 말리바였다. 말리바가 대주주인 티에스피와 티에스디의 대표이사 역시 KEC 회장과 그의 가신들이었다. 말리바라는 회사가 대주주로 있는 회사 모두는 KEC 회장의 친인척과 측근들이 경영실권을 잡고 있다는 이야기다.

홍콩 말리바라는 회사는 실체가 불명확한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다. 홍콩은 버진아일랜드나 쿡아일랜드 같은 조세회피처와 더불어 국제적으로 가장 많은 페이퍼컴퍼니가 있는 곳이다. 이번 CJ그룹 비자금 수사에서 밝혀진 바도 홍콩 유령회사가 비자금 조성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KEC가 공식적으로는 관계를 부정하고 있지만 말리바는 현재까지 정황으로 보면 CJ그룹의 홍콩 유령회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09년 KEC그룹(또는 한국전자홀딩스)은 두 개로 나뉘어졌다. 티에스·티에스디·티에스 재팬, 티에스 중국, 티에스 대만 등 티에스(TS)를 이니셜로 하고 대주주가 홍콩의 유령회사 말리바인 그룹과 공식적으로 KEC의 계열사로 등록돼 있는 그룹으로 분리됐다.

그리고 2009년 이후 KEC는 계속된 적자와 구조조정에 시달리고 있다. 그룹의 상당 부분이 홍콩 유령회사로 넘어간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KEC는 현재 서울국세청의 특별조사를 받고 있다. 핵심 내용은 홍콩 유령회사를 통한 역외탈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기회에 여러 의혹의 실체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또한 회사의 부정을 덮고자 민주노조를 와해시키려 했던 부당노동행위 역시 엄벌에 처해져야 할 것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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