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고 있다."

김주영(52·사진) 전력노조 위원장은 98년부터 정부에 의해 집요하게 추진되는 전력사업 민영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추진됐던 분할·매각식 전력·가스산업 민영화 정책은 한국전력에서 화력 5개사와 원자력 1개사가 분할된 이후 노동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2004년 이후 유보됐다. 그 대신 이명박 정부는 시장을 여는 방식을 택했다. 국민적 반발을 일으킬 수 있는 노골적인 분할·매각이 아니라 시장개방·경쟁도입이라는 우회로를 찾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전력산업 시장화 정책은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고 있다.

10년 넘게 전력산업 민영화·시장화 저지투쟁에 앞장서 온 김주영 위원장은 지난 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공공노련 사무실에서 <매일노동뉴스>와 만나 "전력산업 분할·민영화 정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전력노조는 올 한 해 전력산업 시장화 정책 저지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현재 공공노련 공동위원장과 공기업정책연대 의장을 겸하고 있다.

-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전력산업 시장화 정책이 계속되고 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들고 있다. 새 정부는 스마트그리드(지능형 전력망)를 이용해 경쟁체제를 심화시키려 한다. 그럴 경우 대놓고 분할하고 매각한다고 할 때보다 노조에서 대응하기가 더 어렵다. 교묘하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스마트그리드에 대한 환상부터 깨야 한다. 실시간 요금제를 적용해 주택이나 기업이 선택적으로 싸게 전력을 사용하게 하자는 것인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허구다. 탐욕스러운 민간을 불러들여 재벌들에게 부를 나눠 주는 계획일 뿐이다."

김 위원장은 친재벌 에너지 정책을 막고, 갈수록 커지는 한국전력(KEPCO)의 부채규모를 줄이기 위해서는 전력거래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1년 이후 발전회사들은 전력거래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팔고, 한전은 다시 전량 구매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전력을 주식처럼 사고파는 거래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한전은 앞으로도 민간에서 전기를 비싸게 사야 하기 때문에 적자가 늘어날 것이고, 민간은 계속 부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한전의 부채가 늘어나는 것은 정부 정책에 따른 구조적 문제인 것 같다.

"한전에서 원가 이하로 산업용 요금을 공급받은 대기업들은 연간 수십조원의 흑자를 낸다. 그런데도 고마운 줄 모른다. 원가에도 미치지 않는 전기요금을 현실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전의 부채가 계속 늘어나는 것이다. 정부는 적어도 원가 유지를 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한 공기업에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은 옳지 않다."

- 공기업 부채 문제가 나올 때마다 방만경영·철밥통·신의 직장이란 공격이 반복되는데.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억울하다. 사실 정부나 정치인들도 공기업 부채의 근본원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런 식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결국 인기영합주의, 포퓰리즘에 다름 아니다."

- 박근혜 정부가 공기업 부채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의도가 무엇이라고 보는지.

"정부가 부채관리와 책임경영을 얘기하는데 과연 부채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는 건지 아니면 이를 빌미로 구조조정 같은 액션을 취하려는 건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예의주시하고 있다."

- 정부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력노조를 10년 넘게 이끌어 오는 동안 최근 5년이 가장 악몽이었다. 공공부문에 대한 이해가 없는 낙하산들이 들어오면서 공공기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박근혜 정부는 공공부문이 자기 역할을 알아서 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줬으면 좋겠다. 공공부문 지배구조도 바꿔야 한다. 각종 위원회에서 노동자들을 배제해 놓은 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소 잡을 때 쓰는 칼을 아무 곳에나 휘두르는 일을 자행하는 실정이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공기업 선진화로 인해 공공성의 가치들이 얼마나 많이 훼손됐는지 진지하게 평가해 봐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같은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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