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사회보험과 법정 정년제도를 만들었잖아요. 연금보험을 받는 시기는 70세 이상이고, 정년은 65세인데요. 19세기 말 독일의 평균수명은 50세 미만이었어요. 제도의 실효성을 따지면 의미가 없다고 봐야죠. 물론 사회통합과 노동계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적 상징성은 있었습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 퇴직한 정부 고위관료의 말이다. 지난달 3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른바 정년연장법(고용상 연령차별 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관한 얘기다. 개정안에 따르면 2016년에는 300인 이상 공공·민간기업, 2017년부터는 전 사업장에 정년 60세가 의무화된다.

문자 그대로 보면 정년연장법은 기업에게 부담을 준다. 그런데 노동시장 현실에선 그렇지 않다는 게 퇴직한 정부 고위관료의 판단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은행권만 해도 법정정년은 58세이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실제로는 부장급 승진연령인 4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에 희망퇴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최근 베이비부머가 몰려 있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정년연장 또는 퇴직 후 재고용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사무·관리직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희망퇴직을 하지 않은 고령 직원들은 후선역제도나 성과부진자관리제도를 통해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퇴사하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든 구조다. 기업들은 취업규칙과 단체협약에 명시된 정년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상시적으로 구조조정을 했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져 버렸다. 정년제도 의미 자체가 실종된 것이다. 노동시장이 유연화되면서 정년제도가 법조문에 있는 문구로만 사문화된 셈이다.

퇴직한 정부 고위관료가 정년연장법을 비스마르크 개혁에 빗댄 이유도 이 때문이다. 법정 정년을 연장했더라도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공공기관과 대기업의 종전 행태를 볼 때 실효성이 적을 것이라는 우려다. 일각에선 기업들이 정년연장법을 회피하기 위해 조기퇴직을 서두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아예 “임금조정을 하지 않으면 정년연장법이 고용불안을 초래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한편에서는 공공기관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기득권만 강화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고용이 보장된 정규직 노동자의 정년마저 연장된다면 노동계 내부격차가 더 커질 것이라는 얘기다. 정년연장법이 논의된 지난해 9월 정기국회에서 이미 거론된 사항이다. 때문에 국회와 정부는 정년연장법 적용시점을 늦추되 중소 영세기업에 먼저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한다.

노동시장 전문가들은 정년연장법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공공기관과 대기업에 앞서 중소 영세기업부터 시행해야 한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인력난을 겪는 중소 영세기업의 법정 정년을 보장한다면 높은 이직률을 줄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물론 중소 영세기업의 임금체계 개편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정부가 중소 영세기업의 임금체계 개편을 지원하면서 연장된 정년을 준수하도록 하되, 공공·대기업은 노사가 자율적으로 풀도록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국회 논의 과정에서 제도 시행의 현실성이 우선적으로 고려됐다. 기업들의 반발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정년을 연장하면 비용부담이 수반된다는 논리에 밀려 공공기관과 대기업에서 먼저 시행하기로 했다. 정부 지원은 임금체계를 개편하는 사업장으로 국한했다. 중소 영세기업이든 공공기관과 대기업이든 임금체계를 개편하면 정부 지원의 대상이 된다.

이쯤 되면 경영계가 정년연장에 반대하면서 절반은 얻었다고 봐야 한다. 적어도 기업규모에 상관없이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정년연장법을 통한 중소 영세기업 지원이라는 정책의 선택과 집중은 실종돼 버렸다. 정년연장법에서 파생되는 정부 부담은 정리되지 않은 채 노사의 몫으로 떠넘겨지게 된 셈이다.

정년연장법은 우리 사회가 고령화를 대비하기 위해 내딛는 첫 번째 시도다. 그렇다고 정년연장법이 유연화된 노동시장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년연장법이 노동시장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종전의 임금체계를 개편하라는 얘기다. 이명박 정부 시절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와 복수노조 허용으로 집단적 노사관계가 변곡점을 맞이하게 됐다면 박근혜 정부에선 임금체계 개편이라는 화두가 던져졌다고 볼 수 있다. 그간 고용유지를 위해 정년연장을 외쳐 온 노동계도 이젠 임금체계 개편이라는 숙제를 풀어야할 때가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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