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4일로 현대자동차 비정규 노동자들이 철탑에 오른 지 딱 200일이 된다. 최병승 현대차 사내하청 해고자와 천의봉 금속노조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사무국장이 그들이다. 그들의 주장은 단순하다. 현대차의 불법파견 인정과 정규직 전환이다. 최병승씨는 지루한 법정싸움 끝에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까지 받았지만 무용지물인 상황이다. 또 다른 철탑과 종탑에 오른 쌍용차와 재능교육 해고자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2일 현재 한상균 전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과 복기성 비정규직지회 수석부지회장은 163일째, 오수영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장 직무대행과 여민희 조합원은 85일째 각각 고공농성 중이다. 특히 쌍용차지부는 지난달 25일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가 노사 대화 테이블을 마련해 달라고까지 요구했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이 밖에도 대표적인 장기투쟁 사업장인 유성기업과 골든브릿지투자증권 노동자도 정부가 공정한 관리·감독과 제도개선에 나서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고용률 70% 구호만이 난무한 박근혜 정부다. 하지만 지금 목숨을 내걸고 투쟁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더 이상 외면만 해선 곤란하다. 노사관계에서 정부의 역할이 무엇인지 되새겨 볼 때다. 고공농성과 장기투쟁 당사자들이 박근혜 정부에 바라는 목소리를 들어봤다.

정부의 침묵이 현대차 배짱 키워 

최병승
현대차 사내하청
해고자

어제 노동절을 맞아 많은 언론사들이 농성장을 찾아 소감 등을 취재해갔다. 하지만 농성을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취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신 농성 날짜와 노동절에 어울리는 뉴스 소재로 소비돼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았다. 농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이러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검찰과 고용노동부는 불법파견 업체에 대해 할 수 있는 행정조치에 대해 손 놓고 있다. 정부는 민간기업의 문제라며 노사 자율을 말하지만 이는 하청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미필적 고의에 다름 아니다.

정부에게 묻고 싶다. 법원의 판결을 이행해 달라는 우리의 요구가 무리한 것인가. 박근혜 정부가 상시·지속적 비정규 업무에 대해 정규직화를 약속했는데,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근속 기간은 5년에서 15년에 이른다. 근속년수만 해도 상시·지속적 업무인 셈이다.

현대차가 배짱을 튕기는 데에는 정부의 침묵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이번 박 대통령의 방미에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동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이러한 사인을 현대차에 계속 보내는 한 현대차 사내하청 문제는 영원히 난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현대차 사내하청 문제는 한 민간기업의 사안이 아니다.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풀 수 없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앞으로 비정규직 문제 또한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진정성을 보이려면 최소한 현대차 사업주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라도 만들어줘야 한다. 정부뿐 아니라 시민단체와 언론 모두가 함께해 주기를 간곡히 호소한다. 저는 수도승이 아니다. 고공농성으로 신기록을 세우고 싶지 않다. 빨리 현장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일하고 싶은 노동자일 뿐이다.

노동자 의견 듣고 대화부터 시작해야 

한상균
전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

쌍용차 문제는 단순한 노사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미 확인됐다. 그런데도 방치하는 정부는 무책임하다. 설사 개별노사관계 문제라 하더라도 이처럼 사회적 파장과 아픔이 있는 곳에 적극 개입하는 게 올바른 정치가 아닌가. 정부가 최소한의 역할을 못한다면 철탑에 오르고 거리에서 싸우는 동지들은 희망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다.

일방적으로 노동자 편을 들라는 게 아니다. 정부가 노와 사 양쪽의 얘기를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들어 봤는지 궁금하다. 노정대화는 물론 회사와 정부, 노사 간 대화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동조차 없다. 국민 대다수가 쌍용차 문제 해결을 바라는데 빨리 해결하는 것이 국민대통합과 세상의 첫 걸음이 아닐까.

우리는 상하이차부터 마힌드라까지, 쌍용차뿐 아니라 제조업에 진출한 해외 투기자본이 미치는 피해까지 함께 고민하고 있다. 단순히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까지 바라보고 있다. 사선을 넘나드는 노동자들이 막다른 선택을 하지 않도록 정부가 나설 때다. 의견을 듣고 대화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학습지교사를 노동자로 인정하라 

오수영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장
직무대행

지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새벽 울산·평택·서울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철탑으로 종탑으로 쫓겨 올라갔다. 야만적인 세상이다. 새들이 사는 고공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손짓하며 겨울을 넘겨 봄을 맞았지만 해결은커녕 뜨거운 여름과 장마·태풍을 걱정하는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장기투쟁사업장의 문제가 단 한 곳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친기업 정부’였던 이명박 정부가 임기 시작 후 바로 거대한 분노의 촛불을 맞이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재능교육 학습지교사들은 노동자로서 모든 의무를 다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는 단 한 가지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학습지교사들의 간절한 소망은 모성보호가 되고 노조가 인정되면서 차별과 부정영업이 없는 행복한 일터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행복해진다. 그래야 우리 가족들이 행복해진다.

박근혜 정부가 후보시절 약속했던 ‘모든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려면 여성이자, 어머니이자, 선생님이자, 가장인 학습지교사의 간절한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한다.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인정 △단체협약 원상회복 △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해 혜화동성당 종탑에 올랐다. 박근혜 정부가 학습지교사를 노동자로 인정하고 노동조합법과 근로기준법을 적용해 줄 것을 요구한다.

언제까지 노동현안 외면할 텐가 

홍종인
금속노조
유성기업아산지회장

유성기업 노동자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이, 쌍용차 해고자가, 재능교육 교사가 극단적인 투쟁을 택한 배경에는 그만큼 극단적인 상황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조사를 비롯한 여러 공약을 하고 당선됐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노동현안 해결 없이 노동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최근 정부나 국회를 보면 정년연장이나 대체휴일 문제로 노동현안을 덮어 버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게 한다. 노동자들의 현안은 외면하고 해결할 의지도 내비치지 않으면서 노동시장의 외형적인 큰 틀만 정리하려는 모습이 한심스럽다.

노동자 현실이 어떤지 살펴보고 정부차원에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 현대차 비정규 노동자의 고공농성이 200일이 넘어가는데도 정부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다. 유성기업 노조파괴 문제도 세상에 드러난 지 2년이 넘었다. 이제는 정부의 판단이 나와야 할 때인데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지금이라도 노조파괴 과정에서 등장한 복수노조에 대해 조치해야 한다.

정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기에 노조파괴범은 지금도 아주 잘 살고 있다. 반면 노동자는 여전히 거리에서 투쟁하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반대로 된 것이다.

정부가 이렇듯 중재나 해결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니 노동자는 외면과 고립 속에서 극단적인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분신과 자살이 잇따르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정부가 지금처럼 노동현안에 해결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더 많은 노동자가 죽음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다.

공정한 게임룰 지켜야 경제민주화 가능 

김호열
사무금융노조
골든브릿지투자증권
지부장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를 주장하고 있다. 또 기업주의 불공정거래행위, 불법적 사익추구행위, 부당노동행위를 엄단하겠다고 밝혔다. 이제는 그것이 진정성이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경제민주화의 전제는 게임의 룰이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주와 권력자는 위법행위로 떼돈을 벌거나 처벌을 감안하더라도 큰 이익을 누리는 반면 노동자와 서민은 불가피한 위법행위에도 치명상을 입는 기존의 법질서 운용은 공정하지 못할 뿐더러 경제민주화를 명백히 저해한다.

최근 GM대우자동차 사장은 수천명의 불법파견으로 엄청난 이익을 취하고 고작 7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반면 노동자와 시민이 파업이나 집시법위반, 명예훼손죄를 지면 상황을 떠나 수백만원의 벌금을 받거나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 구속까지 각오해야 한다. 장·차관들은 주민등록법을 위반해도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자녀교육 목적이라고 하면 면죄부를 받는다. 이는 재발방지가 불가능한 법질서 운용이며, 공정하지도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노동자와 시민의 권리보호가 가장 취약한 것이 현실이다. 노동자와 소비자의 권리를 제한하며 성장한 거대 기업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기는커녕 법질서마저 편향되게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노동자와 소비자·시민의 권리가 강조되고, 기업에게는 사회적 책임을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 위법행위를 자행하는 기업은 선진국과 같이 거액의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물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 그래야 기업의 존재와 성장이 사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경제민주화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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