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올해 1월 횡령으로 구속수감된 최태원 회장이 2차 항소심을 마친 다음날인 지난달 30일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보란 듯이 발표한 SK그룹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든다. 연초부터 한화-이마트-SK로 이어진 대기업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발표 시점과 내용이 마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반복되는 데자뷰처럼 정황도 비슷하다. 횡령과 배임 혐의로 구속수감된 그룹 총수의 사면을 염두에 두거나 이미 불법으로 밝혀진 자신의 비리를 호도하려고 사회적 여론의 호의적 반전을 노린 포석이 읽혀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배경과 의도야 어떻든지 법적 제어와 규율이 어려운 민간부문에서도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여러모로 시도되는 이 흐름 자체는 나쁘지 않다. 2015년까지 공공부문의 상시·지속업무를 하는 비정규 노동자를 전원 정규직화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 한국사회 전체의 비정규직 문제 개선의 중요성을 환기시킨 것처럼 10대 그룹에 속하는 대기업들의 잇단 비정규직 정규직화 발표와 시행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무시할 수 없겠다. 하지만 꼭 이런 모양새로 비정규직 문제 개선이 활용돼야 쓰겠는가 싶어 쓴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절반에 육박하는 노동자가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기업복지·사회복지 차별을 감수하는 노동시장의 심각한 불평등 문제인 비정규직 문제에는 노동인권 침해만 있는 게 아니다. 내수기반을 결정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불가능하게 하고 민주주의 지지기반을 잠식하고 결국 사회통합을 저해한다. 결국 기업이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을 정부나 지자체가 떠맡는 양상으로 치달은 것이다. 따라서 지불능력이 충분하고 그간의 비정상적인 비정규직 양산과 남용으로 가장 막대한 초과이윤을 독점한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군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야 하는 건 마땅한 사회적 책임이다. 그런데 꼭 이런 방식으로 해야 하는가. 지난해 서울시는 두 차례의 비정규직 고용개선 대책을 통해 직접고용 비정규직과 간접고용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면서 기존 무기계약직 전환으로 대표되는 공공부문 정규직화 모델을 넘어서는 공무직이란 새로운 정규직 고용형태를 선보였다. 무기계약직은 기간을 정하지 않은 근로계약이라는 점에선 정규직과 같지만, 실제 정규직과 동일한 고용안정이나 처우를 보장하지 않는 새로운 고용형태로 중규직 또는 가짜 정규직으로 불리면서 온당한 의미의 정규직화를 왜곡하는 편법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고용안정을 담보로 처우개선을 유예하거나 희생시켜 결국 정규직화의 원래 취지를 퇴색시킨 점이 문제가 된 것이다. 애초 비정규 노동자의 고용안정이란 측면에서 무기계약직은 의미가 있었지만 진성 정규직으로의 신분상승 사다리가 차단됐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했고, 특히 무기계약직 전환자의 근속이 늘어나면서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차별 문제가 중요한 현안으로 대두됐다. 서울시가 처우개선을 동반한 고용안정 정규직 모델로 설계한 공무직이 주목받은 이유다.

여기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민간 대기업들이 발표한 비정규직 정규직화의 내용을 보면 무기계약으로 고용안정을 담보하는 의미가 작지 않지만 충분한 진성 정규직화 능력이 있음에도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식의 정규직화 내용에는 의구심이 간다.

이것이 마치 전체 민간부문이 본받아야 할 표준모델인 것처럼 언론이 추켜세우니 더욱 그렇다. 민간부문의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공공부문의 무기계약직이 많은 문제점을 낳은 것처럼 임시방편이나 대증요법으로는 애초 정규직화 취지를 거스르는 여러 폐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개선과 해결이 요지부동으로 막혀 있는 민간 대기업에서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전환 움직임이 만시지탄이지만, 그저 반길 수만은 없는 이유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사회적 지탄을 비켜 갈 출구로 사고하면서 활용하는 방식은 지양해야 마땅하다. 제대로 된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공히 설계하고 실행하면서 시너지를 주고받아야 할 때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에도 등급이 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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