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훈기자

"산별노조가 잘못한 게 아니다."

매일노동뉴스가 최근 펴낸 책 <왜 다시 산별노조인가>에서 김승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기업을 뛰어넘는 형식은 아무리 둘러봐도 산별노조말고는 보이지 않는다. 산별노조에 대한 한계가 아무리 제기돼도 지난 200년간 노동자들이 취한 여러 조직 중 가장 효과적이었던 조직이 산별노조다."

그런데 요즘 산별노조는 아프다. 시름시름 병이 들어가고 있다. 무엇이, 누가, 어떻게 산별노조를 병들게 하는 걸까. 진단이 정확해야 올바른 처방이 나올 수 있다.

<왜 산별노조인가>가 세상에 나온 이유다. 이 책의 저자는 33명이다. 국내 5개 산별노조에서 몸담고 있는 노동운동 활동가와 산별노조를 연구한 노동·경제학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이 현재 산별노조가 처한 상황과 나아갈 진로에 대해 내린 각각의 진단과 처방을 담았다.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왜 산별노조인가> 출판을 기념한 '북 토크'가 열렸다. 박성국 매일노동뉴스 대표이사가 사회를 보고 저자를 대표해 강지현 금속노조 단체교섭실장과 신쌍식 금속산업사용자협의회장 직무대행, 공광규 금융노조 정책본부 실장이 패널로 참석했다. 딱딱한 토론회가 아니라 힘을 빼고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박한 자리였다.

산별 노사관계, 밥은 먹어도 술은 안 먹는 관계?

“그동안 학자나 연구단체가 산별노조 관련 책을 엮어 낸 적은 있었지만, 현장에서 산별노조를 직접 만든 이해당사자들이 책을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어떤 분들이 글을 썼는지 알아보는 시간부터 갖도록 할까요.”

사회자는 금속노조의 강지현 실장에게 신쌍식 회장 직무대행에 대해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느닷없는 질문에 나온 첫마디는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였다.

강 실장은 “(신 회장 직무대행은) 공인노무사인데, 어떤 사용자도 사용자단체 회장을 맡지 않아 직무대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신 회장 직무대행 이전에 사용자단체 교섭대표를 맡았던 심종두 전 노무사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이름에 ‘쌍’자를 쓴다고 밝힌 신 회장 직무대행은 ‘발끈’했다. 그는 “오해하면 안 된다”며 금속사용자협의회 체계를 설명했다. 금속사용자협의회는 2006년 고용노동부장관의 허가를 받은 비영리법인이다. 한국경총과 같은 사용자단체다. 금속사용자협의회에 이어 2007년 금융사용자협의회도 사단법인으로 등록했다. 심 전 노무사가 교섭대표를 맡았던 2004년은 법적으로 아무런 권리가 없는 단체가 전문가에게 교섭을 위임한 형태였고, 현재의 신 회장 직무대행은 등기임원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는 금속사용자협의회의 사무실이 신 회장 직무대행이 몸담고 있는 노무법인에 세를 들고 있을 뿐 독자적인 사무운영을 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금속산별의 노사관계는 어떨까. 신 회장 직무대행은 “금속 산별교섭은 정말로 신사적”이라고 소개했다. 그렇게 상대를 존중해 주는 교섭이 없다는 설명이다. 교섭테이블 위에서 다루기 힘든 의제를 다루기 전에 단체교섭실과 사용자협의회 사무국에서 실무적인 접촉도 한다. 강지현 실장은 “금속산별 노사관계는 점심식사는 하지만 술자리는 안 하는 관계”라고 표현했다.

산별노조보다 오랜 역사, 산별노조연석회의

이날 토론회는 매일노동뉴스와 산별노조연석회의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산별노조연석회의는 98년 보건의료노조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산별노조를 출범시키기 이전부터 결성된 조직이다.

공광규 실장은 “90년대 중반부터 산별모임이 있었다”며 “출발은 북유럽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아 국제사무직노조연합(UNI)이 실시한 교육사업”이라고 설명했다. 95년 민주노총 출범으로 산별노조 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 매달 정례적으로 양대 노총을 뛰어넘는 산별교섭 담당자 조찬모임이 열리면서 활발한 교류가 이뤄졌다. 비록 연구소의 조찬모임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사라졌지만, 산별노조연석회의라는 네트워크는 유지되면서 그 결과물로 <왜 다시 산별노조인가>의 출판이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산별노조연석회의가 한국의 산별노조가 태어나기 전부터 보이지 않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 셈이다.

금융노조의 경험은 민주노총 산별노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 실장은 “전두환 정권 이전까지 금융노조는 시중은행끼리, 국책은행끼리 공동교섭을 한 경험이 있었다”며 “단체협약 체계에도 그런 전통이 남아 있어 외환위기 이후 산별전환과 산별교섭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고, 민주노총에서 산별노조 건설을 추진하면서 금융노조 사례를 활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사용자단체끼리 교류도 있을까. 신 회장 직무대행은 “금융사용자협의회측과 안부 정도는 묻는 사이”라며 “산별교섭 전후로 서로의 전망을 듣기도 하면서 그렇게 지낸다”고 밝혔다.
 

정기훈기자


멀고 험난한 산별교섭 법제화

최근 산별노조운동과 산별교섭이 정체해 있다는 것에는 대부분 이견이 없다. 산별교섭 법제화 논의는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신 회장 직무대행은 “중층교섭 구조에서 이중·삼중의 파업을 하는데 사용자들이 산별교섭 법제화에 반가울 리 없다”며 “금속노조와 산별교섭을 하는 입장에서 산별노조를 부정하지 않지만 법제화의 전제조건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실장은 “중층교섭 구조 해소가 법제화의 전제라고 말하는 사용자의 심경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며 “한진중공업의 경우 손해배상 가압류 금지라는 금속 산별협약서에 서명해 놓고도 금속사용자협의회를 탈퇴했다는 이유로 지키지 않으니, 노조로서는 또 다른 안전장치를 만들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산별교섭 법제화는 최소한의 초기업단위 교섭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신 회장 직무대행은 “금속사용자협의회를 탈퇴해도 단체협약 효력은 유지된다”고 반박했다.

금융 산별 노사는 2009년부터 단체교섭을 2년마다 한 번씩 개최하고, 연 2회 중앙노사위원회를 진행한다. 중앙노사위원회에서는 단협에서 위임된 내용부터 인력이나 노동시간 문제까지 광범위한 의제를 다룬다. 공 실장은 "산별노조운동이 정체에 빠지면서 회의론도 제기되고 있지만 현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고민의 깊이가 더해져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왜 다시 산별노조인가>의 저자 중 한 명인 은수미 민주통합당 의원도 이날 북 토크에 함께했다. 은 의원은 “노동과 정치가 참 닮았다”고 쓴소리를 했다. 은 의원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점에서 정치는 정치불신을 낳고 노동운동은 운동불신을 조장한다”며 “정치불신과 운동불신을 서로 주고받는 게임을 이제 더 이상 하지 말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자는 아니지만 현장에서 산별노조를 일구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북 토크 자리를 같이했다. 박성현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기업별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금속노조로 모이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논쟁들이 있었다”며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원칙은 노동자는 하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철 사무금융서비스노조 수석부위원장은 “<왜 다시 산별노조인가>의 출판이 산별노조운동이 전진할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류기섭 노동부유관기관노조 위원장은 “제도의 뒷받침 없이는 산별노조운동이 정체를 넘어 고사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며 “제도개선과 산별노조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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