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넘어 누웠는데 산 너머 서울 쪽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무슨 빛인가 하는데, 크르릉 쾅쾅 포탄 소리가 창문을 흔들었다. 아뿔싸! 미사일이 서울을 때렸구나. 베란다 창으로 달려갔다. 핵미사일일까. 피난은 어디로 가지. 가족들은 어떻게 하나.

6·25를 겪은 어머니께 물어봐야지. 갖가지 생각이 스쳤다. 창문을 열었다. 빛은 보이지 않았다. 포탄 소리도 들리지 않고, 빗소리가 쏴 하더니, 하늘에서 우르릉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둥소리였다. 가족들을 살피니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이야기를 하니, 어머니가 영등포 당산동에서 사셨던 아홉 살 무렵 겪은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의 전쟁은 한밤중 곤한 잠을 깨운 쿵쾅쿵쾅 하는 소리로 시작됐어. 쿵쾅 소리가 멈추자, 이웃집에서 뚝딱뚝딱 소리가 들렸지. 사람들이 뭘 하나 싶어 대문 틈과 담장 너머로 보니 집집마다 방문이며 대문을 대못으로 박더라고. 아침이 밝으니 사람들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아이들도 무등 태우고 손목 잡고 남쪽으로 떠났지.”

“엄마가 라디오를 다락에서 갖고 내려와 켰는데, 이 대통령 목소리가 흘러나왔어. ‘국민들은 안심하시오. 국민들은 안심하시오’라는 말을 몇 번이고 했지. 방송 들으며 짐을 싸는데 제일방직 경비로 일하던 아버지가 귀가하며 하는 말씀이 ‘한강 다리가 폭파됐다. 빨리 피난 가야 한다’고 하셨어. 가장 값나가던 게 재봉틀과 라디오였는데, 그걸 부엌 찬장 마루 아래 땅 파고 묻고서는 그 위에 연탄을 채워 놓고 피난을 떠났어. 나중에 알고 보니 이승만과 높은 사람들은 남쪽으로 벌써 내뺐더라고.”

“피난 짐으로 이불과 옷 보따리·숟가락·바가지 싼 게 다야. 나뭇가지를 꺾으면 되니까 젓가락은 필요 없어. 온 가족이 피난길에 올랐는데, 부모님과 응재 오빠, 여동생 정숙이 모두 다섯이었어. 그런데 안양 근처에서 인민군에게 따라잡혔지. 일제 때 아버지는 38선 이북이던 철원에서 면서기로 일했기 때문에 해방 후 나만 두고 온 가족이 도망가 서울에 정착했고, 나는 나중에 서울로 왔지. 하여튼 안양 수리산 안골에서 인민군 치하를 겪게 됐어. 아버지가 수양누님으로 모시던 분의 친척 동네였어. 그런데 그 옆집이 알고 보니 인민군 장교 집이었는데 만석꾼으로 아주 깨끗한 한옥이었어.”

“그 집 막내아들이 응재 오빠와 동갑이라 서로 친구가 됐지. 우리 오빠는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부르고 그 오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을 불렀어. 그 집에서 마을사람과 피난민도 잘 보살펴 줬어. 어느 날, 아들인 인민군 장교가 왔다며 그 집 할머니를 만나고 갔지. 그날 동네잔치를 했던 것 같아. 떡도 얻어먹고. 어린 내가 보기에도 부잣집 아들이라 그런지 참 잘났더라고. 내가 겪은 인민군에 대한 기억은 나쁘지 않아. 우리 가족에게 별다른 피해 준 것도 없고. 그 여름 안골 피난생활은 조용히 지나갔지. 우리 아버지가 개구리를 잡아서 갈대에 줄줄이 꽂아 돌아오시던 모습이 생생하네. 개구리 고기 되게 맛있어.”

“영등포 집에 고추장과 쌀을 가지러 엄마랑 수리산 자락을 나서 안양에 도착하니, 인민군 차량들이 나뭇가지로 위장을 하고 건물이나 나무 밑으로 차량을 피난시키고 사람들도 피하라 하더라고. 제트기가 뜬 거야. 갑자기 삐오옹 하고, 따다다다 총소리가 들리더니, 꽝하면서 나는 정신을 잃었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니, 앞에 있던 집들이 날라가고, 나는 흙 속에 묻혔고, 저만치 우리 엄마도 흙더미를 헤치며 일어서더라고. 흙먼지 잔뜩 묻은 엄마 모습이 얼마나 우습던지, 그걸 보며 깔깔 웃은 기억이 엊그제 같아. 그 후로 인민군 치하에서 안골과 당산동을 오가며 엄마랑 쌀과 고추장을 퍼 날랐지. 미군 폭격 말고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지. 아버지와 오빠는 인민군으로 잡혀갈까 봐 안골에서 나오지 않았어.”

“어느 날 세상이 바뀌었어. 수건을 머리에 동여맨 사람들이 도끼에 삽에 괭이를 들고 오빠 친구 집으로 몰려와서는 다 때려 부수고 고함을 지르며 온 가족을 마당에 끄집어내서 마구 폭행하더라고. 오빠 친구도 같이. 우리 오빠가 말리러 뛰어드는 걸 엄마가 뒤로 빼내 나와 같이 방에 가뒀지. 이튿날 새벽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안골을 떠나 당산동 집으로 돌아왔어. 그런데 인민군을 피했던 아버지가 제2국민역인가 국군에 징집됐지. 이듬해 1·4 후퇴는 아버지 없이 엄마와 떠났고. 그때 중공군도 봤지. 피난 가는 우리와 같이 남으로 내려가는 거지. 말은 안 통하지만, 웃어 주던 기억이 나네. 중공군이 우리를 괴롭힌 적은 없어.”

“응재 오빠는 1·4 후퇴 당시 걸린 병으로 전쟁 중 죽었어. 동생 정숙이도 이듬해인가 복막염으로 죽었어. 엄마는 오빠가 죽은 게 내 탓이라 그랬지. 이북에서 안 넘어와야 할 게 넘어와서 그렇게 됐다나.”

간밤의 섬광이 번개가 아니라 미사일 폭격이었다면, 일요일 아침 커피 한잔 하며 어머니의 피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으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전쟁이란 어느 편이 이기든 인민은 늘 패배하는 것!” 베트남 참전작가 응웬 주이가 보내온 평화 메시지가 떠오르는 아침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