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발표된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실근로시간단축위원회 공익위원 권고안은 노동시간의 유연성을 높이는 쪽에 초점이 맞춰졌다. 기업이 경영사정에 따라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권고안의 줄기를 이루고 있다. 노동시간의 유연성이 높아지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기업 사정에 따라 비정규직을 썼다 자르는 관행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이 반영됐다. 반면에 노동시간의 유연화는 시기상조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노사관계에서 상대적으로 노동자의 힘이 열세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용자에게 비정규직 사용과 노동시간 유연화라는 두 개의 칼자루를 쥐어주는 꼴이라는 지적이다.

◇'노동시간 유연화'로 향하는 노동시간단축 방안=실근로시간단축위 공익권고안에는 “업종과 업무의 특성을 고려해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편성할 수 있도록 탄력적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을 선진국 수준으로 확대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와 함께 “근로시간저축계좌제를 도입해 근로자가 적립된 근로시간을 휴일·휴가로 활용해 일과 가정의 양립을 도모하고, 기업이 불황일 때 고용조정을 최소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탄력적근로시간제의 확대는 고용노동부의 올해 업무보고에서, 근로시간저축계좌제의 도입은 노동부 업무보고와 박근혜 정부의 국정과제에서 언급된 바 있다. 이날 발표된 공익권고안에도 같은 내용이 담겼다. 우리 사회 노동시간단축 논의의 유력한 키워드로 ‘유연화’가 떠오르고 있다는 의미다. 이 두 제도는 특정 사업장 내 일감 변동에 따라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한다는 점에서 ‘내적 유연화’ 방식으로 분류된다. 이와 반대로 물량의 변화에 따라 외부에서 비정규직을 들여오거나 내보내는 방식은 전형적인 ‘외적 유연화’ 방식이다.

탄력적근로시간제는 현행 근로기준법에 이미 담겨 있는 내용이다. 계절적 요인 등으로 특정기간의 주간 평균노동시간이 40시간에 못 미칠 경우, 추후 일감이 많아지면 수당을 받지 않고 연장근로를 하는 것이 이 제도의 핵심이다. 정부와 실근로시간단축위는 이러한 탄력적근로가 가능한 시기를 늘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수당 없이 연장근로가 가능한 기간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근로시간저축계좌제의 개념도 이와 유사하다. 일감이 늘어 초과근로가 많을 때 노동자는 법정노동시간에 해당하는 급여를 받고, 나머지 수당은 저축해 놓는다. 대신 불황이 닥쳐 일감이 줄면 예전에 저축해 놓은 수당을 받아 급여를 보전하거나 유급휴가에 들어간다. 초과근로시간을 저축할 때 급여 할증률을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는 그만큼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알맹이 없는 노동시간 유연화, 시기상조"=근로시간저축계좌제와 탄력적근로시간제는 시장 수요에 따른 탄력적인 기업운영으로 고용을 안정화하고, 경기침체기에 휴가를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한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수당 없는 연장근로’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노동계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내용이다.

노동시간의 유연화를 수용한 대표적인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고용 타격을 덜 받은 나라 중 하나다. 그 때 효과를 발휘한 제도가 바로 근로시간저축계좌제였다. 독일의 노동자들은 그동안 쌓아온 근로시간계좌를 청산해 휴가를 떠나는 방식으로 고용을 유지했다.

관건은 독일의 성공사례가 우리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느냐다. 이에 대해 노동문제 전문가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독일의 경우 강력한 산별노조가 사용자의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을 벌이고, 특히 노동시간을 결정할 때 노조가 직접 참여하고 있다. 사용자에 비해 노동계의 힘이 약한 우리나라에서 이 제도가 성공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또한 미래를 위한 저축보다는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의 국민적 정서도 무시하기 힘든 요소다.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상시적 위기의 사회에서 미래를 위한 대비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검증조차 된 바 없다. 또 기업이 도산할 경우 노동자들이 쌓아놓은 근로시간계좌를 보전받을 방안도 제시된 바 없다.

박태주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제도 정비가 전혀 돼 있지 않고, 제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도 없고, 노조의 힘까지 약한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춰볼 때 노동시간의 유연화는 시기상조”라며 “자칫 내적·외적 유연화를 모두 늘려 노동자의 삶이 더욱 피폐해지고, 일과 삶의 조화가 파괴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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