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A은행 지점장들이 대거 가입한 관리자급 기업별노조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가 허용되지 않았을 때였다. 다수 노조가 산별노조인 금융노조라서 그런지 고용노동부는 설립신고증을 내줬다.

은행의 꽃으로 불리는 지점장들의 노조 설립은 은행권에서 처음이었고,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점에서 사용자에 가까운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노조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음 한 일은 자신들이 다니던 은행을 상대로 미지급 임금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다. 37명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소송에 참여했다.

사연은 이렇다. A은행 노사는 2004년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이듬해 3월부터 시행했다. 기업별노조를 만든 이들이 바로 적용대상이었다. 만 55세를 넘은 지점장급 직원뿐만 아니라 노조 가입 대상자도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았다.

임금피크제 대상이 되자 급여가 대폭 깎였다. 하는 일도 이른바 후선업무로 바뀌었다. 이들은 소장에서 “일정한 연령에 도달한 근로자들의 임금을 감액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근로자에게 불이익한 취업규칙 변경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임금피크제를 담은 노사 단체협약이 당사자들의 동의를 받지 않은 데다, 조합원도 아니어서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명 가까운 변호사에게서 승소 가능성이 높다는 자문도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2008년 8월 법원은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시간이 흐르자 조합원들은 하나둘 기업별노조를 떠나갔다. 임금이 깎이다 보니 소송을 진행할 돈을 모으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관리자급 노조는 힘을 잃었다.

만 55세 임금피크제냐, 퇴직이냐

당시 법원은 “임금피크제는 만 55세에 도달하지 않는 근로자도 적용받는다”며 “전체 근로자가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과반수 노조가 임금피크제 동의주체”라고 판시했다.

81년에 입행해 32년차를 맞는다는 시중은행 직원 박희철(56)씨. 그에게도 여지없이 만 55세가 찾아왔다. 만 55세가 되자 은행은 두 가지 카드를 내밀었다. 자녀 학자금을 포함해 명예퇴직금 28개월치를 받을지, 아니면 임금피크제로 5년을 더 일할지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은행은 만 55세를 맞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회사 전산망에 한꺼번에 공지를 띄웠다. 은행 정년은 58세였지만 박씨의 선택지에는 정년보장이 없었다. 은행은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임금피크제를 수용한 것으로 간주했다.

“평소에 누가 정년을 생각하면서 삽니까. 그런데 쉰세 살이면 느낌이 옵니다. 나가는 게 좋을지 남는 게 좋을지…. 그때부터 고민하는 거죠. 중간정산을 받았기 때문에 목돈 생길 일이 없거든요. 명예퇴직으로 목돈이라도 챙기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빚도 조금씩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퇴직금 까먹고 보험 하나 들라고 찾아오는 동료들을 보면 또 생각이 바뀌고 그렇죠.”

박씨는 정년을 보장받았을 때와 임금피크제 대상자가 됐을 때를 비교하면 화가 치민다고 했다. 실제 임금피크제를 선택한 그가 60세까지 5년 동안 일해 받을 수 있는 돈은 정년(58세)을 지켰을 때 받는 3년치 급여보다 60%나 적다. 박씨는 “똑같은 회사에서 30년 넘게 일했는데 나이 먹었다고 일하는 기간은 길고, 받는 돈은 적어지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임금피크제 도입 시점부터 결재권을 박탈하고, 허드렛일이나 마찬가지인 후선업무를 주는데 자괴감이 들었다”며 “차라리 일을 제대로 시키면서 58세까지 정년을 지키는 게 은행이나 직원이나 서로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금피크제, 노사 모두 ‘글쎄’

금융권에 따르면 국책·특수은행과 시중·지방은행 18곳 중 10곳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그런데 임금피크제 적용대상자들의 업무는 대부분 연체관리 같은 후선업무였다.<표 참조>

예를 들어 관리역 같은 직함으로 내부통제 업무를 하거나 채권 사후관리 업무, 마케팅이나 신용조사 업무를 한다.

노조도 고민이다. 금융노조 산하 한 시중은행지부 관계자는 “지점장급 선배들이었는데 후배가 마음대로 일을 시킬 수 있겠느냐”며 “노사 모두 만족하지 못하는 제도”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은행지부 관계자는 “인사적체가 심하기 때문에 노조에서 임금피크제를 권하는 측면도 있다”고 털어놨다.

은행 경영진이라고 해서 임금피크제를 선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10개 은행 중 상당수는 10명 안팎의 인원만 임금피크제를 적용하고 있다. 적용대상자가 많은 우리은행도 한 해 정년퇴직자 200~250명 중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는 경우는 절반을 밑돈다.

명예퇴직과 임금피크제를 모두 피해 간 이들은 임원급 승진자이거나 은행이 지목한 극소수의 실적 우수자들뿐이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지 않은 B은행은 최근 36개월치 특별퇴직금을 지급하는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55세를 기준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상위그룹 일부에게만 기존 업무를 맡기고 그렇지 않으면 후선업무로 빼거나 재취업을 알선하고 있다.

그러니 은행원들에게 정년 58세는 먼 나라 얘기다. 불과 몇 년 전에 모든 은행을 통틀어 정년퇴직자가 1명, 혹은 아예 없다는 통계가 경향으로 굳어진 것이다. 한 시중은행 직원은 58세에 정년퇴직하는 직원 숫자를 묻자 “아주 가끔 나오는 부러운 분들”이라고 대답했다. 그마저도 높은 직급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직급인 팀장이나 부장급에서 ‘가뭄에 콩 나듯’ 나온다고 귀띔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대부분의 은행 직원들은 사실상의 은퇴시기를 55~56세라고 답했다. 퇴직시점과 임금피크제 적용이 시작되는 시점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임금피크제가 기점 역할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비용이다. 은행들은 직원들의 급여수준을 매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한다. KB국민은행의 경우 반기보고서 공시 기준으로 2007년 7천468억원에서 2008년에 8천59억원으로 올랐다가 2009년 7천404억으로 다시 내렸다. 이후 2010년 7천260억원, 2011년 7천205억원, 2012년 7천378억원으로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 평생 일한 직장에서 내몰린 중년 사무직원들의 재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다. 평일 노사발전재단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를 찾은 구직자들이 취업정보를 검색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은행의 '비용 중심' 접근방식이 문제

평균 3% 안팎의 임금인상률을 감안할 때 은행이 총량 수준의 관리를 꾸준히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고임금인 은행 직원들을 일정한 시점에 잘라내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평균 연령이 55~56세를 넘지 못하도록 상시적 퇴직제도를 운영하고, 임금피크제를 유지하는 배경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은행 경영진들의 시각은 뻔하다. 정년보장이나 정년연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가 베이비붐 세대 은퇴에 대비해 법정 정년을 만 60세로 강제하겠다고 공약한 것은 은행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금융노조는 올해 정년을 58세에서 60세로 늘리고, 임금피크제를 실시할 경우 연금수급 연령에 일치시키겠다는 중앙노사위원회 요구안을 조만간 확정한다. 은행권 정년연장 관련논의에서 기폭제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노조의 요구안에는 조기 명예퇴직 금지와 고령직원 직무개발도 담길 예정이다.

이에 대해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 관계자는 “정년보장도 안 되는데 정년연장을 얘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정년부터 보장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재현 숭실대 교수(경영학부)는 “은행들은 평균 정년이 55세”라며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려면 정년연장과 연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연금수급 연령과 은퇴 연령의 차이가 굉장히 벌어져 버티기 어려울 지경이이어서 연금을 수급하는 65세 언저리에서 은퇴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임금피크제가 성공하려면 이들에 대한 직무설계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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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기사] 여야 '60세 법제화' 공감대 형성
쟁점은 임금피크제 법제화 논란과 도입시기


정년연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다. 박 대통령은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를 연계해서 실질적인 정년연장이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수차례 약속했다.

국회에서도 관련논의가 한창이다. 박 대통령의 공약은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해 8월 대표발의한 고용상 연령차별 금지와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안에 담겨 있다.

이 의원 외에도 같은 당 김성태·정우택 의원, 민주통합당에서 홍영표·이목희 의원이 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모두 정년을 60세로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이완영 의원안은 여기에 60세 정년을 어기면 처벌하고, 정년연장에 따른 임금조정 조항이 추가됐다.

쟁점은 임금피크제 법제화 논란이다. 야당은 반대하고 있다. 홍영표 의원은 지난해 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임금조정은 노사 간 자율에 맡겨야 하는 문제”라며 “사회적 합의로 권장해야지 입법이나 시행령으로 할 수는 없다”고 못 박았다.

시행시기나 예외조항도 논란에 휩싸여 있다. 지난해 9월 이재갑 당시 고용노동부차관은 “60세 정년을 연장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시기가 좀 빠른 것 같다”며 유예의견을 냈다. 같은해 12월 법안심사소위에서 최봉홍 새누리당 의원은 “60세로 정년을 연장하되 그 시행시기는 5년 정도로 맞춰서(유예해서) 유도를 하고, 시행령에다 예외조항을 전부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당 김성태 의원은 “고령자가 종사하기에 곤란한 업종에 대한 예외조항이 필요하다”고 거들었다. 같은 당 이종훈 의원은 2년 유예안을 주장했다.

민주통합당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즉시 시행하자”(한정애 의원)는 의견부터 “1년 유예는 받아들일 수 있다”(은수미 의원)는 주장까지 나온다. 정년 법제화 예외조항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로 반대 의견을 낸다.

한편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는 최근 세대간상생위원회에서 노사 간 의견차를 좁히지 못해 합의에 실패했다. 60세 정년 의무화는 재계가 반대하고, 임금피크제 도입은 노동계가 반대하고 있다. 여야가 4월 임시국회에서 어떤 합의를 도출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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