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울산저널
편집국장

2013년 새해 첫 주말 희망버스가 다시 달렸다. 울산 현대자동차 송전탑 농성장과 부산 한진중공업 고 최강서 열사 추모대회에 전국에서 2천여명의 시민들이 40여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움직였다.

날씨는 엄청 추웠다. 울산의 집회가 늦어진 바람에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공장 앞 행사는 저녁 8시를 넘겨서야 시작됐다. 깜깜한 밤이었다. 영도는 섬이라 해만 떨어지면 갯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기다리다 못한 부산시민들과 주최측은 밤 8시가 넘자 행사를 시작했다. 잠시 뒤 40여대의 버스가 속속 도착해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 하나둘 내렸다. 행사가 시작되자 사진기자들이 분주히 무대 앞에서 설쳤다. 기자들의 렌즈는 연신 앞줄에 도열해 앉은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진보정의당 국회의원들에게 맞춰졌다. 뭐가 그리 잘났는지 왜 그들은 늘 앞에만 앉으려 하는지 나는 늘 궁금하다. 나는 금배지와 노동계·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단 한 번도 집회 때 일반 참가자들과 뒤섞여 편하게 집회를 즐기는 꼴을 보지 못했다.

그 사진기자들 틈에 늙은 노신사 두 명이 눈에 띄었다.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 상임대표를 지낸 가톨릭대 사회학과 조돈문(59) 교수와 구로역사연구소의 박준성(55) 선배였다. 박 선배야 여느 노동자 집회에도 자주 나타나 사진을 찍어 왔지만 조 교수의 등장은 놀라웠다. 두 사람의 렌즈는 당연히 앞줄의 금배지들이 아니었다. 저녁밥도 못 먹고 달려와 차가운 겨울의 영도바다 앞에 주저앉아 김밥을 까먹는 시민들이었다.

금속노조 현대차 비정규직지회는 2010년 11월에서 12월로 이어지는 25일 동안 울산공장을 점거해 생산을 마비시켰다. 사흘만 공장을 세우면 원이 없겠다던 그들이 25일을 싸웠지만 현대차 자본은 노조와 합의하지 않았다. 싸움에서 비긴 채 내려온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이상수 지회장은 서울 거점투쟁을 고민했고, 어렵게 2011년 초 조계사에서 거점투쟁을 시작했다. 조계사 앞마당에 작은 텐트 하나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때마침 일본의 비정규직 노조활동가들이 찾아와 현대차 불법파견 투쟁을 궁금해하길래 “지회장이 지금 서울에서 농성 중인데 가서 직접 들어보시죠”라고 던졌다. 그 주말 저녁 일본인들과 함께 찾아 간 조계사 농성장엔 조 교수가 먼저 와서 지회장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당시 조 교수는 학단협 대표였는데도. 그는 허명이 쌓일수록 몸이 무거워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몇 달 뒤 당시 금속노조 박점규 국장이 울산공장 점거투쟁을 담은 르포집 <25일>을 내놓고 출판기념회를 하던 자리에도 조 교수의 발길은 이어졌다. 출판기념회는 민주노총 15층 교육원에서 열댓 명 모아 놓고 치러진 조촐한 간담회 수준이었는데도.

나는 조 교수가 학단협 상임대표가 된 직후인 2010년 2월2일자 경향신문 전면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기억한다. 기자는 조 교수에게 묻는다. “최근 학단협이 존재감이 없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조 교수는 이렇게 답한다.

“학단협은 그간 진보적 학술단체들의 네트워킹에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사회가 많이 민주화됐고, 진보적 연구자들도 국가에 의해 큰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어졌어요. 국가의 학문정책이 정상화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학단협의 역할이 줄어든 대신 개별 학회 단위의 활동이 많아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 배제됐던 진보적 연구자들이 정부 부처의 장관이나 위원회에 참여하는가 하면 국가가 발주하는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예전처럼 정부를 정면 비판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생겼지요. 정부에 참여했거나 프로젝트를 수행한 진보적 성향의 연구자들은 주로 사회과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과학자들은, 일관되게 민주정부의 한계를 지적해 온 인문학자들과 비교할 때 본연의 임무를 방기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어디 사회과학자만 그랬냐”고 변명하는 대신 솔직했다. 이보다 더 통렬한 자기반성은 없다.

학문세계에 들어와 학문을 조종하는 권력과 자본 앞에 누군들 자유로울까. 포스코센터·호암동관·CJ인터내셔널센터·LG연구동·SK연구동 등 서울대 관악캠퍼스를 가득 채운 수많은 재벌그룹의 이름들을 보노라면 이게 대학인가 싶다.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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