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중궁궐은 왕조시대에 임금이 살던 곳이다. 아홉 번 거듭 쌓은 담 안에 자리한 대궐이라는 뜻이다. 백성들이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깊이 자리한 큰 집이다. 왕의 권위주의와 불통을 비꼬는 은유적 표현이다. 지금 그 자리에 청와대가 있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더 깊숙이 청와대가 자리 잡고 있다. 왕조시대 궁궐의 전통을 잇고 있다. 권위주의와 불통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계승된 셈이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청와대는 새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에 한창이다. 청와대를 지은 지 40년이 돼 집무공간이 비좁거나 노후화된 곳이 많아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을 재배치해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른바 ‘소통형 청와대’로 리모델링한다는 계획이다. 구중궁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도다. 궁궐을 새로 꾸미고 담벼락 중 일부를 허물면 국민들에게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까. 구중궁궐을 허무는 일이 이런 공간적·지리적 방법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왕조시대 임금조차 궁궐을 벗어나 백성들의 삶을 살피기 위해 잠행을 했다. 백성과 직접 대면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이다.

청와대만 새로 꾸민다고 구중궁궐 이미지를 벗어던질 수 없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사실 소통형 청와대는 공간 재배치보다 대통령의 행보에 달렸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의 행보에 눈길이 쏠리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런데 지난 대선 이후 박 당선자가 국민들에게 좀 더 다가가려 했는지는 의문이다. 대선 이후 4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평택과 울산 철탑에 이어 성당 종탑으로 고공농성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박 당선자의 발길은 그곳을 향하지 않았다. 박 당선자의 측근들은 한결같이 “당선자께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박 당선자는 직접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지난해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자로 선출된 후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전태일 동상을 찾아가 참배할 정도로 광폭행보를 보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는 전직 대통령들과도 비교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이명박 대통령은 노동문제의 중요성을 인정해 당선자 시절 양대 노총을 방문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한국노총은 방문했지만 민주노총엔 가지 않았다. 당시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이 수배자 신분이라서 검토했던 방문계획을 철회했다. 반면 박 당선자의 경우 이런 계획조차 검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에게 다가가려는 박 당선자의 행보에서 노동계는 배제된 셈이다.

물론 최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산하 국민대통합위원회와 양대 노총 임원들이 면담을 했다.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은 한국노총에 이어 민주노총 대표단과 직접 면담했다. 그런데 형식은 ‘비공개 면담’이다. 비록 인수위원회이긴 하지만 청와대를 상징하는 구중궁궐의 아홉 개 문 중 하나가 이제야 열린 셈이다. 면담과정에서 양대 노총은 박 당선자와 인수위원회의 이런 분위기를 성토했다고 한다. 대통령 당선자는 노동단체를 찾지 않고, 인수위원회에서 소통할 수 있는 노동관련 인사조차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노동단체들이 박 당선자의 당선 인사를 받고자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근 노동정세가 심각한데 박 당선자와 인수위원회가 그리 여기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니 분쟁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절박한 나머지 눈폭탄과 강추위를 무릅쓰고 목숨을 건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박 당선자와 인수위원회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대통령 선거는 끝났고, 새 정부 출범은 얼마 남지 않았다. 새 정부 출범 전에 묵혀 온 노동현안을 해결해야 한다는 게 대다수 국민들의 뜻이다. 말로써 성을 쌓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어 졌다. 그런 만큼 노동문제를 사회적 대화로 풀겠다고 공언했던 박 당선자는 양대 노총과의 직접 대화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노총과의 면담에서 한광옥 대통합위원장은 “한진중공업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가시적인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구중궁궐이 허물어진다. 청와대 리모델링 공사가 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소통형 청와대로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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