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운동의 산 역사인 김금수 선생이 쓴 <세계노동운동사>(후마니타스)가 마침내 출간됐다. 쓰는 데 10년 넘게 공을 들였고, 노동운동가들과 6년 가까이 학습하고 토론했다. 그 열매가 2천쪽 가까운 글이 돼 3권의 책으로 엮였다.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노동자가 출현한 16세기에서 시작해 2차 세계대전의 반파시즘 투쟁으로 끝나는 책은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자유·평등·우애를 향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되짚는다.

한국말로 된 세계노동운동사 책이 마지막으로 나온 지 20년을 훌쩍 넘었다. 1986년 백산서당이 미국공산당 총비서를 지낸 윌리엄 포스터(1881~1961)가 쓴 <세계노동운동사>를 번역해 냈다. 지금은 사라진 소련과학아카데미의 국제노동계급연구소는 1980년부터 1987년까지 <국제노동계급운동: 역사와 이론의 문제> 영문판을 냈다. 모두 6권에 달하는 소련과학아카데미의 대작을 전진 출판사가 1989~1990년 우리말로 번역해 <국제노동계급> 시리즈로 내려 했지만 끝내 마무리하지 못했다. 1989년 태암 출판사는 1945년부터 1979년까지의 국제노동운동사를 다룬 마지막 6권을 번역해 <세계노동운동사: 현대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운동>을 냈다. 그 후로 세계노동운동사에 관한 책은 번역본조차 한국 땅에서 나오지 못했다.

지금이야말로 노동운동사를 읽을 때

노동운동을 돌아보면 기회주의·개량주의·합법주의·혁명주의니 말도 많고, 계급주의·분파주의·관료주의·노동귀족이니 낙인찍기도 많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것들이 역사 속에서 세계 속에서 무슨 맥락으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 왔는지에 대해선 까막눈이다. 조합원은 물론 간부조차 역사와 이론에서 배우지 못하고 학습에 관심조차 없으니, 노동운동이 맨날 그 나물에 그 밥이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한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역사적 전망을 갖지 못하니,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고, 상황이 어려워지면 청산주의에 휩쓸리거나 맹동주의로 자주 기운다. 역사의식이 부재하고 노선과 이념이 정립돼 있지 않다. 정세 판단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니 '너는 틀렸고 나만 옳다'는 편협한 분파주의가 판을 친다. 그 결과 ‘현장’을 외칠수록 진짜 현장의 조합원들은 떨어져 나가고, ‘진보’를 들먹일수록 시대와 사회에 뒤떨어진 존재로 전락하며,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지만 진짜 노동조합의 도움이 절실한 다수의 비정규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을 냉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반(反)노동의 역사적 낙인이 깊숙이 찍힌 정권이 연거푸 집권했다.

오늘날과 같은 낙담과 절망, 혼돈과 침체의 시기에 어설프게 해답을 제시하거나 구하려는 태도는 위험하다. 지금이야말로 수백 년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축적돼 온 노동운동의 역사적 경험과 실천적 지혜에 귀를 기울어야 할 때가 아닐까. 이 점에서 운동가로서의 삶과 경험, 그리고 국내외의 최근 연구성과가 결합된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는 오늘을 고민하고 내일을 열어 가려는 노동운동가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말 그대로의 필독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책상물림이 아닌 학습과 토론의 산물

필자는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출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세계노동운동사 책이 한국 땅에서 23년 만에 처음 나왔다. 한국 노동운동의 패배와 고양, 그리고 침체를 역사의 현장에서 오롯이 겪은 노동운동가가 썼다. 남의 나라 책을 번역한 게 아니라 국내외 연구성과를 성실히 정리해 우리말로 썼다. 유럽과 미국만이 아니라 제3세계 노동운동의 역사를 소개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덕분에 조선과 일제시대 노동자들의 역사도 <세계노동운동사>의 한 장에 당당히 자리 잡게 됐다.

서재와 책상에서 이뤄진 독서와 연구만의 산물이 아니라 노동조합 각급 조직의 활동가들과 함께 이뤄 낸 학습과 토론의 결과물이다. 책 내용은 물론이고 참고문헌·인명 찾아보기·세계노동운동사 연표 등 책의 형식과 구성까지 뛰어난 학자의 책 못지않게 자세하고 꼼꼼하다.

저자는 노동운동의 본령인 국제주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기에, 책 곳곳에서 국제노동운동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뙤약볕을 맞으며 비좁고 붐비던 콜카타의 책방 거리에서 인도 노동운동 자료를 찾기 위해 발품을 마다않던 저자의 모습이 생생하다.

“대안체제는 수평선 위에 있지 않다. 기존 체제의 해체, 심지어 붕괴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자본과 노동) 어느 쪽도 무엇이 일어나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고 얼마 전 작고한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썼다. 미래는 모르지만, 과거는 알 수 있는 것. 어설픈 해답을 구하기 앞서 역사에 진지한 질문을 던져 보자. 어제가 모여 오늘이 됐듯이, 오늘이 모여 내일이 될 것이기에….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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