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장을 든 사람들이 이른 아침 울산 현대중공업 앞 도로를 행진해 갔다. 곡소리가 울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고 이운남씨의 노제를 지냈다. 정기훈 기자

"운남아, 내가 어찌 너를 보내냐. 운남아, 엄마가 왔다."

허망하게 아들을 잃은 팔순 노모의 흐느낌은 그가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그칠 줄 몰랐다.

지난 21일 향년 42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 고 이운남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노동자의 장례가 26일 울산에서 울산노동자장으로 엄수됐다.

"이제 더 이상 좁은 방에서 갇혀서 흐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동지들 가는 길에 희망만이 가득하길 바랍니다."(고 이운남 유서 '동지들에게' 중에서)

마지막까지 '동지들의 희망'을 기원하며 그는 울산 동구 공영화장장에서 한 줄기 연기로 세상과 하직했다. 경남 양산 솥발산 열사묘역에 영원히 잠들었다.

너무 여리고 착한 사람이었기에…

이날 오전 6시30분 울산대병원에서 발인식을 마친 운구행렬은 고인이 생전에 그토록 일하고 싶어 했던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으로 향했다. 선한 눈빛을 한 고인의 영정사진이 앞섰고, '비정규직 철폐하라', '노조탄압 중단하라' 만장이 뒤따랐다.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7시, 현대중 정문은 벌써부터 오토바이를 탄 노동자들의 출근행렬로 북적였다. 현대중 정문 건너편 인도에서 열린 영결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유족과 울산지역 비정규직 등 100여명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다. 조준호 진보정의당 공동대표와 노회찬 의원이 참석했을 뿐 여당 정치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간 이운남 동지, 미안하고 진짜 고개를 못 들고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를 병들게 하고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비정규직의 차별과 분노, 자본의 폭력과 탄압…. 하지만 동지가 죽음을 앞에 두고 힘들어할 때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부끄럽고 미안할 뿐입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김주철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사를 읽었다. 97년부터 함께했던 울산 노동자들에게 고인은 너무도 여리고 착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김 본부장은 “강하게 버티고 싸워야 하는 노동운동을 하기에 너무도 여리고 착했기에 현대중 경비대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마음의 병이 깊게 들었는데도 고인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 박현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장과 조합원들이 울산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열린 고 이운남씨의 영결식에서 헌화한 뒤 묵상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구사대 폭력이 남긴 깊은 상처

전남 영암에서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고인은 중학교를 마친 어린 나이에 서울 성수공단에서 노동자 삶을 시작했다. 야학에서 공부하면서 노동운동에 눈을 떴다. 97년 울산으로 거처를 옮겨 현대중 사내하청업체 명호산업에서 용접일을 시작했다. 고인은 7년간 이곳에서 몸담으며, 동료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조성웅 전 현대중 사내하청노조 위원장은 “같은 업체에서 동생들에게는 ‘좋은 형’이었고, 형들한테는 소위 ‘싸가지 있는 동생’이었다”며 “2003년 노조 설립을 위해 발기인모임을 할 때도 그의 힘이 컸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사내하청노조가 설립된 후 형제처럼 지내던 동료들이 출입증을 빼앗고 공장 밖으로 내몰자 고인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조 전 위원장은 “현대중 정규직노조 간부를 지낸 경력이 있는 업체 사장이 하청노조 때문에 폐업한다며 직원들을 종용한 결과”라며 “운남이에게는 구사대로 돌변한 동료들이 경비대 폭력보다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현대중에서 쫓겨난 고인은 하청노조 조직부장을 맡으며 상근활동을 지속했다. 몰래 공장 안으로 들어가 노조 홍보활동을 하다 경비대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고 쫓겨나는 일이 반복됐다. 박일수 현대중 사내하청 노동자가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한 2004년 2월14일 고인은 동료 2명과 함께 현대중 크레인에 올라 점거농성을 벌였다. 농성은 길게 가지 못했다. 5시간 만에 경비대에 의해 진압당했다. 고인도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됐다.

그해 4월9일 박일수 현대중 사내하청 노동자를 묻던 날, 고인은 석방됐다. 이날 그의 동료들은 고인이 공황발작 증상을 보이는 모습을 처음 목격했다. 폭력과 탄압이 남긴 깊은 상처였다.

오세일 전 금속노조 현대중 사내하청지회장은 “심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18일간 격리치료가 필요하다는 병원 진단을 받았다”며 “운남이를 치료하려고 병원을 찾았지만 철창이 달린 감옥 같은 모습에 발길을 되돌렸다”고 회상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고인의 동료들은 당시 병원 치료만 제대로 받았더라도 이런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며 가슴을 쳤다.

오 전 지회장은 “고인은 폭력 후유증으로 2004년 이후 8년의 세월을 고통 속에서 살았다”고 말했다. 고인은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철탑농성이 지속되는 이유도, 최강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직차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자신의 탓이라며 자책하고 괴로워했다고 동료들은 전했다. 특히 이달 21일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파업이 회사 관리자들의 폭행으로 얼룩진 것이 고인의 죽음에 도화선이 됐다.

조성웅 전 위원장은 “그날 카카오톡으로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 사진을 접한 운남이가 내게 전화를 걸어 ‘손이 떨려서 운전을 못하겠다’고 불안해했다”고 말했다. 이어 “자정 무렵에 다시 통화했을 때는 ‘힘들 때 또 연락하겠다’고 말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며 고개를 숙였다. 동료들이 고인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차별 없는 세상으로 잘 가거라"

2004년 박일수씨가 스스로 몸을 불살랐던 현대중 전하문 앞에서 이날 고인의 노제가 치러지는 동안에도 8년 전과 마찬가지로 푸른색 점퍼를 입은 경비대 십여명이 공장을 에워쌌다. 고인의 둘째형인 이아무개씨는 “운남이가 이제는 비정규직도 없고 차별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근심걱정 모두 덜어 놓고 편히 지낼 것 같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고인은 유서에서 "양심이 허물어진 삶은 의미 없는 삶이라 생각한다.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며 살고 싶었고, 회사 폭력의 후유증으로 우울증을 앓아 왔지만 원칙을 잃지 않고 살아왔다"고 썼다.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며 노동자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시대를 고인은 그렇게 끝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고 이운남 현대중 사내하청 해고노동자의 삶



1971년 전남 영암 출생

1997년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명호산업) 입사

2003년 현대중 사내하청노조 창립 발기인, 초대 조직부장

2004년 박일수씨 분신정국에서 현대중 크레인 점거농성 돌입. 5시간 만에 진압된 후 구속수감

2006년 해고자 신분으로 현대중 사내하청노조 상근, 현대중 경비대 폭력으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발병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참가

2012년 현대자동차 공장포위의 날 참가 등 연대활동

2012년 12월22일 오후 5시20분 울산 동구 방어동 아파트 19층에서 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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