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전국불안정
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이미 대통령 당선자가 결정됐을 것이다. 누군가는 환희하고 누군가는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사회의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이 선거의 결과를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유력 후보 중에 누군가가 당선됐겠지만 둘 중 누군가의 당선이 과연 노동자들에게는 희망이 되거나 고통이 될 것인가. 대통령 선거 결과가 나오지 않은 지금 ‘대통령선거가 노동자들에게 남긴 것’이라는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유력 후보 중 누군가의 당선이 결코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노동’이 실종됐다고 이야기한다. 대선 초반만 해도 경제민주화가 중요한 이슈 중 하나였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돼 있었다. 그런데 선거가 진행되면서는 ‘정치개혁’이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중·후반에 들어와서는 ‘정권교체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가 됐다. 그러면서 정책이나 변화의 방향과 관련한 세심한 논의, 노동자들의 삶을 결정하는 많은 문제들은 모두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노동문제는 중요한 화두가 될 수 없었다. 그저 정권교체가 되면 노동문제도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환상만이 떠돌았다.

노동문제가 후보에 대한 지지연설이나 텔레비전 유세에서 다뤄지기는 했다. 하지만 노동문제는 매우 안타깝고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등장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현대자동차 비정규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정작 그 고통이 김대중 정부로부터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신자유주의 15년간의 결과임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정치에 등장할 때는 정치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시혜의 대상이었다. ‘노동’을 말해 왔던 진보정당의 후보들은 오로지 정권교체를 위해 ‘노동의 권리’를 말하지 않는 후보의 손을 들어주고 사퇴했다. 소위 진보정치, 지난 15년간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최후를 확인한 것이다.

노동계의 많은 인사들이 문재인 캠프와 안철수 캠프로 흘러 들어갔고 그들은 정권교체가 돼야 최저임금도 인상되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개선도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꿈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됐다. 그것은 지난 15년간의 정치세력화가, 국회의원을 많이 당선시켜서 대신 해결해 주는 방식으로만 이해돼 온 ‘대리주의 정치세력화’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래서 현장의 노동자들은 혼란스러웠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폭력적 탄압에 의해 사망한 수많은 열사들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 그 시절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길거리로 내몰리고 탄압받았던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것이 다시 무기력감을 낳고, 이명박 시대에 대한 공포로 압박하면서 투표를 강요하는 광풍 속에, 다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됐다.

선거는 끝났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시기가 지속될 것이다. 2013년 경제위기가 다시 온다고 이야기하고 전경련에서는 “일상적 구조조정이 시작됐다”고 선언한다. 경제위기를 빌미로 한 구조조정·노조탄압·정규직 양보론이 지속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시혜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한 약간의 개선은 있을지 모르겠다. 후보들이 그렇게 공언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나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당하고 탄압당하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선거의 시기에 권리의 주체로 서지 못한 이들이 선거 이후에 어떻게 권리의 주체로 설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주목하지 않았으나 의미 있는 흐름을 기억해야 한다. 심지어 민주노총조차도 “이번에 독자적인 노동자 후보를 내지 못했다”고 공식 선언하며 무시하는 그 순간에도 선거 한복판에서 "노동자들이 정치의 주체"라고 이야기한 이들이 있다. 득표와 상관없이 싸우는 이들의 목소리를 알리고자 했던 노동자대통령 후보다. 설령 ‘대통령 후보’라고 하더라도 ‘노동자’라는 이름을 붙인 순간 재벌들을 지키는 경찰과 용역은 본능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노동자대통령 후보는 ‘노동자들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보여 주는, 이 상징적인 정치의 장벽을 온몸으로 부수며 노동자들의 정치를 만들자고 이야기해 왔다.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넘는 철탑 위에서, 어쩌면 유력한 당선자를 지지해야 조금이라도 더 희망에 가까워질지도 모르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현대차 비정규 노동자들이 김소연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던 그 마음을 다시 새겨야 한다. 노동자들이 초대받지 못했던 잔치는 이제 끝이 났다. 남의 잔치에서 춤을 추는 일은 이제 그만하자. 노동자 스스로 정치의 주체가 될 때 권리의 주체도 될 수 있다. 이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할 때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