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지연 변호사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1937년 삼천리(三千里) 1월호에는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 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당시 레코드회사 문예부장과 영화배우 등 많은 사람들이 총독부에 댄스홀을 허락해 달라는 공개탄원서를 제출했다. 지금이라면 누구나 치안담당자에게 댄스홀을 금지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당시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1791년 프랑스는 르샤플리에법을, 1799년 영국은 단결금지법을 제정해 노동자들의 단결과 단체행동을 금지했다. 해당 법은 노동자들의 기본권 행사를 “인위적인 것”, “불온한 것”, “혼란스러운 것” 나아가 “위법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단결금지법은 노동의 단결을 막지 못하고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2012년 봄 대학생 A양은 경찰로부터 ‘소환통지서’를 받고 깜짝 놀랐다. 지난해 6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씨를 응원하기 위해 희망버스를 탄 것이 발단이 됐다. 허가되지 않은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김씨는 통장의 개인정보와 이동전화 통화내역까지 낱낱이 조회당했다.

2012년 가을 회사원 B씨는 은행으로부터 ‘금융거래 정보 등 제공사실 통보서’를 받았다. 지난해 1월 고용승계와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던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에게 5만원을 후원한 게 발단이 됐다. 검찰은 허락되지 않은 기부금품을 모집했다는 이유로 해당 노조를 수사하고, 후원에 동참한 일반 시민들의 계좌를 무더기로 추적하고 있다.

현행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기부금품법)은 1천만원이 넘는 기부금품을 모집하고자 하는 자는 관할 시·도지사에게 등록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국민은 많지 않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실제 등록되고 있는 규모도 전체 연간기부금 총액의 1%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한겨레21 제926호). 사문화된 법률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사문화된 법률이 유독 적용되는 곳은 각종 사회운동과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촛불집회 광고를 게재하려고 기부금을 모집한 대학생, 강동균 강정마을 회장, 홍익대분회 이숙희 분회장이 차례로 기부금품 위반 조사를 받고 있다. 경찰은 강정마을회가 조사를 받던 중 등록을 신청하자 “찬반 의견이 엇갈리는 사안”이라며 허가를 거부하기도 했다. 집시법과 마찬가지로 기부금품법이 사실상 경찰에 의한 허가제로 운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심지어 정부는 ‘국가의 정책을 반대하기 위한 모금’을 아예 원천적으로 금지할 수 있도록 기부금품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이쯤 되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적인 법률을 넘어 독재국가의 여론통제 도구라고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지 않겠는가.

동법의 입법취지는 ‘건전한 기부문화 조성’이라고 한다. 건전한 기부문화를 조성하기 위해서라면, 형법의 사기죄나 공갈죄로 불건전한 부정모금을 단속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건전한 모금이라면 단속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정부가 기부금품법의 존속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기부금품법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관이다. 기부금품법은 1천만원 이상을 모집하고자 하는 ‘주체’를 상정하고, 위 ‘주체’가 타인의 재산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규제하고자 한다. 기부금품법이 전제하고 있는 관계는 타인의 이득이 나에게 손해가 되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관계다. 그리고 중심과 주변이 나뉘는 일방적인 관계다.

그러한 세계관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십시일반이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억압당하는 타인의 해방 없이 나의 해방도 불가능하다는 연대의 원리도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촛불이, 강정이, 홍대가, 희망버스가 보여 준 세계는 그러한 세계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김여진과 날라리들이 홍대 청소노동자의 싸움을 위해, 당신이 나의 싸움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을 때 누가 주체고 누가 손해인가 라는 질문은 얼마나 무색한가.

총독부가 '딴스홀'을 금지할 수 없고, 국가가 노동의 단결을 금지할 수 없듯이, 자본주의적인 사고가 ‘자본주의 너머의 것’을 금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감히 말하건대 대한민국에 연대를 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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