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속노동자 ilaor.org

“지금의 산별노조운동은 낳을 산(産)자를 쓰는 산별이 아니라 흩어질 산(散)자를 쓰는 산별운동이다.”

“고용유연화의 흐름 속에서 산별노조운동은 대공장 조직노동에 기반하는 기존의 ‘닫힌’ 운동을 혁신하지 못해 계급대표성의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산별노조운동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정규직 조합원들은 기업별노조로 회귀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무기력한 현실안주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조합원들이 초기업단위 차원의 단결이나 사회정치적 투쟁에 갈수록 둔감해지고 있다”

금속노조가 19일 오후 경주 교육문화회관에서 개최한 정책토론회에서 나온 산별노조운동에 대한 진단은 뼈아팠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지금까지 전개된 산별노조운동을 ‘1기 산별노조운동’으로 정의했다. 1기 산별노조운동은 지난 10년간 조직형식적 측면에서 상당히 진보했다. 하지만 ‘산별 만능주의’에 빠져 내실있는 조직전환의 과정을 밟지 못했다. 때문에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우선, 산별교섭과 조직운영의 실질적 측면보다는 지역-업종 골간체계에 대한 논쟁이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또 산별노조운동의 당위성을 과도하게 앞세워 조합원들이 초기업적 계급적 연대감이나 산별적 정체의식의 경험을 쌓지 못했다. 조직의 그릇은 산별노조로 전환됐지만 내용은 따라가지 못하는 ‘무늬만 산별노조’가 탄생한 배경이다.

이 교수는 “묻지마식 산별전환이 이뤄지면서 조합원은 물론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산별전환의 계급적 의의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연대적 경험 축적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비정규직 조직화사업이 산별노조운동을 질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임에도 별다른 성과가 없는 것, 산별노조 전환 이후 노조간부-조합원, 중앙-현장, 투쟁-교섭, 정책결정-집행, 조직 노동자-미조직 노동자 간의 분할이 더 심화되고 있는 것이 그 결과다.

이 교수는 “한국적 특성에 맞는 산별노조 발전전략을 정립하지 못한 채 해외 산별노조의 운동경험이나 조직과 교섭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방식으로 전개해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 문제점이 드러났다”고 진단했다. 산별교섭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 문제도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이 교수는 1기 산별노조운동의 한계에 봉착한 가장 큰 원인으로 지도부의 미숙함을 꼽았다. 그는 “지도부의 미숙함으로 산별노조 내부의 역동성은 희미해지고, 현장기반이 약화되면서 극복하려던 내부의 분열이 되레 강화됐다”며 “그 결과 산별노조운동의 효과와 신뢰가 상실되고 침체의 악순환 덫에 빠지는 형국”이라고 밝혔다.

“점진적으로 지역중심 산별노조 재편하자”

금속노조의 진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토론자로 나선 황우찬 금속노조 포항지부장은 “계급적 산별노조운동으로 중심을 이동하기 위해서는 지역산별노조운동을 강화해 기업별체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지부로의 조직 재편은 15만 거대 금속노조 출범 이후 항상 제출되는 대안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지역지부 재편을 위한 로드맵, 장기발전전략이 제시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황 지부장은 이를 위해 금속노조 사무처 채용간부를 8년에 1번, 1년6개월씩 지역지부로 순환근무하고 6개월간 안식휴가를 거친 후 복귀하는 시스템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기업지부 상근인력을 지역지부로 배치하는 방안도 함께 제시했다. 또 재정마련을 위해 오는 2018년까지 매년 0.1%씩 조합비를 인상해 5년 후 조합비를 1.5%로 상향조정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윤한섭 현대차지부 기획실장은 “2007년과 2008년 ‘중앙교섭 성사 없이 현대차지부 교섭 타결없다’는 구호를 내걸고 투쟁했지만 조합원들에게 산별노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확산시켰다”고 비판했다. 윤 실장은“내년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기업지부 해소 안이 다뤄질 예정이지만 내부 동의절차를 밟지 못했다”며 “기업지부와 지역지부가 공동사업을 통해 점진적으로 기업 담벼락을 낮추는 과정을 거칠 때 조합원의 동의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희 금속노조 정책기획실장은 ‘과감한 혁신’을 강조했다. 이 실장은 “대부분 내년에 기업지부를 해산하고 지역지부를 건설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예상하고 있다”며 “지역지부로 당장 재편이 어렵다면 조직역량의 상당부분을 지역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차지부나 기아차지부의 상근간부 1명 이상을 지역으로 배치해 일상적으로 지역사업을 같이하는 방안이나 현재의 시도 단위 지역지부를 2~3개로 나누는 과감한 조직개편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산별교섭 역시 완성차 교섭이나 자동차산업협회와의 교섭 등 업종별 교섭을 병행하고, 내년 주간연속 2교대제 시행을 앞둔 자동차 부품사들이 뭉쳐 순환파업 등을 통해 완성차업체를 상대로 한 집중투쟁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복수노조 시대, 지역연대가 답이다”

직장폐쇄·용역경비 투입, 복수노조 설립 수순으로 이어지는 노조파괴 시나리오에 맞서는 해법도 ‘지역연대’가 일순위로 꼽혔다. 안재원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산별노조운동의 지체와 현장조직력의 약화 속에서 노동이 포섭을 넘어 해체의 국면으로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안 연구위원은 SJM지회 사례를 들며 “지역차원의 공동대응이 노조파괴를 넘어설 수 있는 위력을 발휘했다”며 “지역공동 사업을 활성화해 지역사업에 기업지부의 결합력을 높이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금속노조 '정책대의원대회' 첫 시도

19일 열린 금속노조 정책토론회는 노조의 내년 사업계획과 예산안을 정하는 임시대의원대회 속에 하나의 순서로 마련돼 눈길을 끌었다. 노조는 올해 처음으로 토론회와 대의원회의를 함께 하는 '정책대의원대회'를 시도했다.

이날 토론회는 3개의 주제로 열렸다. 첫 번째 주제는 '금속노조 운동에 대한 평가와 발전방향'으로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가 발제를 맡았다. 금속노조와 현대차지부·기아차지부, 포항지부와 경기지부 정책통들이 패널로 나섰다.

두 번째 주제는 안재원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 발제한 '복수노조 시대, 지역연대와 현장조직력 강화'다.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와 복수노조 제도 도입 이후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성찰과 반성, 과제와 대안들을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요즘 가장 뜨거운 감자인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대선투쟁'에 대한 토론이 세 번째 주제로 다뤄졌다.

이날 대회에 참석한 대의원들은 원하는 주제를 선택해 토론에 참가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