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들의 대선캠프행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연초에 민주통합당에 입당한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부터 최근 문재인 캠프에 합류한 문성현 전 금속산업연맹 위원장, 안철수 캠프에 합류한 이용식 전 민주노총 사무총장과 남궁현·곽태원·김형근·김영길 등 전직 산별연맹 위원장들까지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들의 대선캠프행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배신의 계절”이라고 탄식하기도 한다. 아무리 진보정당이 사분오열 좌충우돌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핵심과제로 삼았던 민주노총 간부들이 이렇게 집단적으로 문재인·안철수 캠프로 가는 것은 감정적으로 용납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냉정하게 지난 십수 년간의 정치세력화 운동을 살펴보면 이러한 민주노총 간부들의 야권행은 배신이라기보다는 정치세력화에 관한 주류노선의 필연적 결과에 가까워 보인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이름 아래 숨겨져 있었던 여러 모순이 민주노동당 분당,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논란,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태를 거치며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야당행은 배신이 아니라 노선에 따른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추진했고, 진보정당으로 구체화된 정치세력화 운동의 모순은 크게 보면 세 가지로 보인다.

첫째, 정치세력화의 최종 목적지로 설정된 집권정당 프로그램.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정치세력화의 중장기 목표는 매번 '20XX년에 민주노동당이 집권한다'는 것이었고, 다수당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집권이나 국회 다수당이 돼 노동자에 유리한 제도를 만들고 노동자 세상을 만든다는 계획은 현실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관점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 계획에는 노동조합의 역할, 노동자의 역할이 설 자리가 없었다. 실제 진보정당이 노동조합과 관련해 가장 크게 한 사업은 당원모집 사업과 선거 시기 투표독려 사업이었다. 선거 시기 득표율이 정치세력화의 성과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한 노동조합은 두 가지 의미에서 대상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자체가 선거 시기 투표독려 사업으로 제한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조합 자체가 현실적으로 투표력(보팅파워)이 별로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민주노조운동이 만들어 낸 진보정당의 집권전략하에서 역설적으로 노동조합은 작은 옵션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결과로 정치세력화는 노동기반을 떠나 국민정당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노조 조직률이 하락하고, 계급적 동질성도 하락하는 가운데 득표율을 높이기 위해 진보정당은 노동을 중심에 둔 활동보다는 여론에 따라 중심 정책을 이동해 나간다. 90년대 중반부터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에서 나타났던 현상이다. 대중조직과 정당의 관계보다는 여론을 수렴하는 시스템·당 대표·국회의원 등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여론사업이 정당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 결국 정치세력화의 끝은 노동조합 없는 정당이다.

이 두 가지 맥락에서 보면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들이 차기 대권을 쥘 가능성이 큰 후보들에게 가는 것은 배신이라기보다 현실적 선택이다. 당분간 통합진보당·진보정의당·진보신당 연대회의 등이 집권 프로그램을 제시할 전망도, 그렇다고 국민적 여론을 따라갈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노동친화적 제도를 만드는 데는 차라리 집권 가능성이 있는 야당으로 가는 것이 상대적으로 낫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통해 꾸었던 꿈은 사실 이렇게도 변화가 가능하다.

셋째, 정당 자체의 모순. 민주노동당과 같은 대중정당이 됐건, 전위정당이 됐건, 정당은 그 존재 자체가 엘리트주의적 한계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정당이 노동조합과 다른 것은 정당이라는 조직이 다루는 의제가 상당한 지적작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사회이슈부터 법 제정까지 정당이 다루는 의제가 그렇고, 정치인의 역할이 그렇다. 이런 이유로 생각해 보면 노동자 정당을 표방했던 민주노동당의 대표적 정치인들 역시 전문 직종 출신이거나, 혹은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계급정당을 표방한다고 하더라도 공단 출신의 노동자가 정당의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정당이 가진 엘리트주의적 편향은 민주노총의 최상위 간부들의 지향과 종종 부합한다. 이번에 민주통합당과 안철수 캠프로 간 상당수의 전·현직 간부들 대부분이 오랜 기간 민주노총 상층에서만 활동해 온 사람들이라는 점도 이를 잘 보여 준다. 또한 반대로 정당활동을 하다 노동조합 현장활동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극소수라는 점도 그러하다.

두고두고 ‘배신의 계절’로 기억될 2012년 가을. 민주노조운동은 이제 섣부른 대선운동보다 십수 년의 진보정당운동, 정치세력화 운동에 대해 근본적으로 평가할 때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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